백장현(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장)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유럽 출장길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손에 들고 찍은 사진이 화제이다. 일본에 대해 굴욕외교를 하고 있다는 비판 여론에 항의하듯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강변하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투키디데스 함정’이란 세계 패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기존 패권국과 신흥 도전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걸 지칭하는 용어이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스파르타-아테네 전쟁이 필연적이었던 것은 아테네의 부상과 그에 따라 스파르타에 스며든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심복으로 불리는 한 장관은 미 · 중 간 패권 경쟁이 전쟁으로 갈 개연성이 크기 때문에 윤 정부는 승자가 될 미국을 선택한 것이고, 일본과 관계 정상화는 한 · 미 · 일 공조체제 구축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은 것 같다. 윤 정부 인사들은 지금의 국제정세를 신(新)냉전으로 규정하고, 한국은 미국 편에 서야 한다고 작정한 듯싶다. 과연 지금의 국제질서가 신냉전일까?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난 7일 인천국제공항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들고 출국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미국의 세계적 공급망 재편 시도 빠르게 부상하는 중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미국 사이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안보를 명분으로 세계적인 공급망 재편을 추진하고 있다. 세계를 민주주의와 독재체제의 대결 구도로 만들어 동맹과 우방국을 규합해 반도체 · 대용량 배터리 · 핵심광물(희토류) · 바이오 의약 등 전략 품목에서 중국을 고립시키려 한다. 그간 미국은 제조업을 소홀히 했던 결과 러스트벨트 지역 등에서 산업 공동화가 발생하였다. 바이든 대통령이 ‘중산층을 위한 외교’의 선거공약을 내건 것도 실업문제 등으로 인한 백인 노동자들의 불만을 의식한 것이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시작된 미국 중심의 산업정책과 보호무역 조치는 바이든 행정부에 들어와 더욱 체계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핵심 제조업을 다시 미국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인플레이션 감축법 · 반도체법 등 노골적인 무역 장벽을 세우고 있다. 그간 자유무역과 세계화의 주창자였던 미국이 국내 정치적 필요 때문에 이를 팽개치고 진영 대결의 반(反)중국 전선 결집에 나서면서 국제질서가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럽 국가들이 반(反)러시아 공동전선 구축을 위해 미국과 공조함으로써 세계의 진영화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 미국의 의도는 성공할 수 있을까? 아마 다음 몇 가지 이유로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첫째, 지난 30여 년의 탈냉전 시기를 거치며 세계는 역사상 유례없는 인적 교류와 교역의 증대로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다. 특히 중국과 세계 각국의 상호 의존도가 깊어졌다. 중국의 교역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는 아세안은 중국과의 교역액이 2000년 290억 달러에서 2021년 6,690억 달러로 늘어났다. 아세안-미국 교역액은 640억 달러에 불과하다. 2위를 차지하는 유럽연합의 교역액도 2020년 5,860억 유로에 이른다. 미국과의 교역액 5,560억 유로보다 더 많다. 중남미 국가들의 중국 교역액도 2002년 180억 달러에서 2019년 3,150억 달러로 늘어났다. 브라질의 중국 수출액은 2000년 연(年) 10억 달러 정도였는데 지금은 매 4일마다 10억 달러에 이른다. 미국과 정치 · 안보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아랍 걸프만 국가들도 경제적으로 중국과의 상호 의존도가 깊어졌다. 걸프협력기구 국가들의 중국 교역액은 2000년 200억 달러에서 2020년 1,610억 달러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 미국 교역액은 400억 달러에서 490억 달러로 증가하는 데 그쳤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2021년 중국과의 교역액이 3,015억 달러로서 미국 1,691억 달러, 일본 847억 달러를 능가한다. 홍콩과의 교역액 397억 달러를 합치면 중국 교역액이 미국·일본·유럽연합의 합계와 비슷하다. 둘째, 세계를 민주주의와 독재 정치체제의 이념 대결로 유도해 중국을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의도도 성공하기 어렵다.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갈등을 겪고 있는 아세안 10개국만 해도 정치체제가 민주정 · 독재정 · 공산주의 체제 · 절대왕정 등 다양하다. 민주주의와 독재의 이분법적 구분이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미국은 중국의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 정책이 개발도상국을 부채 함정에 빠뜨리는 사악한 계획이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유엔 193개국 중 140개 국가들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아예 노골적인 냉소를 던지고 있다. 미국이 주창하는 신뢰가치사슬이 작동하려면 상호 신뢰가 있어야 하는데, 미국의 자국 중심주의 때문에 동맹 · 우방국도 믿고 따라가기 어렵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반(反)러시아 공동전선을 펼치고 있는 독일·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도 미 · 중 가운데 택일하라는 요구에는 냉담하다. 올라프 숄츠 독일 수상은 <포린 어페어스>에 기고한 글에서 현재의 국제질서는 양극(兩極)이 아닌 다극(多極) 체제로 가고 있으며, 독일은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한 다자(多者)주의 방식으로 국제 협력을 추진하겠다고 천명하였다. 올라프 숄츠 독일 수상 Ⓒ 위키미디어 셋째, 미국경제와 중국경제의 연계가 심화돼 미국 소비자와 기업들이 중국과의 경제 단절을 원하지 않고 있다. 2022년 미 · 중 교역액은 6,906억 달러로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 수치는 트럼프 시기부터 미국 행정부가 무역 장벽을 세우고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했지만 미국 내 기업들이 중국과의 관계를 끊을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 소비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월마트의 상품 70%가 중국산이라는 점도 미국 행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각자도생의 G0 시대에서 필요한 것은 이념이 아닌 실용주의 지금 국제질서가 신냉전으로 가고 있다는 윤 정부의 판단은 잘못되었다. 선별적 · 파편적으로 보호주의가 진영화되고 있지만, 가치나 이념보다는 자국 실리에 기반하고 있어 진영 구분이 모호하고 가변적이다. 미국이 보호주의 진영화를 추진하는 것은 단독으로 중국을 막아낼 수 없기 때문인데, 세계 각국이 보호주의 진영화에 참여하는 것은 각자도생의 현실에서 생존을 위한 방편인 것이다. 지금 시대는 G2가 아니라 G0 시대인 셈이다. 윤석열 정부 인사들은 각성해야 한다. 미 · 중 가운데 미국에 줄 서 정책 공조라는 이름 하에 미국 지시대로 가는 것은 자기 비하이고 국익 포기이다. 미국이 제조업 4대 핵심 품목 중 반도체·배터리·의약품 등 3개의 제조 협력 국가로 한국을 거론한 것은 지구상에서 이를 모두 생산할 수 있는 국가가 한국밖에 없기 때문이다. 얼마나 대단한 국력인가? 대한민국이 이러한 레버리지를 갖고서도 윤 정부 인사들의 비루한 인식 때문에 국격이 훼손되고 국익이 내팽개쳐져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