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원(북한대학원대학교 수료) 우리 아버지는 생의 많은 부분을 군인으로 사셨다. 북한에서는 어느 정도 철이 들면 대부분 부모님을 아빠, 엄마보다는 아버지,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부른다. 물론 어른이 되어도 아빠, 엄마로 부르는 사람도 있으나, 그 경우 ‘버릇없는 사람’이거나 ‘교양 없는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우리 아버지는 만 16세(당시 한국 나이로 17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 군에 입대하셨다. 그리고 병사생활을 몇 년 하고 군관학교(장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를 다녀오셨다. 20대 중반 이른 나이에 군관이 된 아버지는 27세에 엄마와 결혼 하셨고, 그 이듬해에 내가 태어났다. 37세에 중좌(한국의 중령)의 군사칭호로 비교적 빠른 승진을 하신 아버지였으나, 40세 초반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면서 조직으로부터 이런저런 불이익을 받고 타지로 조동(調動)명령을 받으셨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북한식으로 표현하면, “혁명화”이다. 혁명화는 북한식 인간개조 방식의 하나로 현재도 북한의 인사정책에 자주 활용된다. 인간개조는 북한이 정권 수립 초기부터 중요하게 추진한 사업으로 쉽게 얘기하면 ‘인간의 의식 속에 혁명사상을 주입시켜 당의 요구대로 행동하는 새 인간형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혁명화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우선 일반적인 혁명화는 북한의 주체사상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무장시키고 주체사상의 요구대로 사고하고 행동하기 위해 부단히 수련하는 과정, 그 자체를 의미한다. 즉 북한 주민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끊임없이 혁명화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받은 혁명화는 조금 다른 성격의 혁명화다. 군사칭호 강등, 당 책벌, 조동 등 3중 처벌의 혁명화였다. 직급의 강등, 철직(직위해제) 등 행정적 처벌과 함께 당원에서 후보당원으로 정치적 지위를 낮추는 당 책벌 등 과오의 정도에 따라 처벌의 수위도 천차만별이다. 아버지가 받으셨던 혁명화, 즉 처벌의 강도는 다행히 회생 가능한 수준이었다. 기간도 3년으로 정해져 있었고, 그 3년 내 큰 문제 없이 반성의 노력을 보이면 혁명화는 끝나게 된다. 강도 높은 혁명화에 걸려 농장이나 탄광 등 어려운 곳으로 배치받아 힘들게 일하다 혁명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생을 마무리하는 사람도 적지 않아 우리 가족은 그 정도 처벌임을 다행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혁명화를 끝내고 승진하셨으나, 결과적으로 전 직급을 회복하지는 못하셨다. 혁명화가 끝났다고 전 자리로 복귀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혁명화를 벗고’ 나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게 돼서 다행이라고 말씀하셨다. 부모가 혁명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연좌제가 북한에서는 여전히 행해진다. 그렇게 아버지는 전역한 날 소박한 꾸러미를 나에게 내미셨다. 파란 색깔의 2단 도시락통이었다.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 들고 학교 가는 나를 위해 아버지는 당신의 퇴직금 전부를 쓰신 것이다. “자, 내 제대비(전역 퇴직금)로 산 거니까 맘에 들었으면 좋겠다.” 아버지의 발언에 우리 가족은 모두 웃었다. 30년 가까이 직업군인으로 사셨음에도 우리 아버지가 받은 퇴직금은 시장에서 도시락통 하나 겨우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버지는 국정가격(국가에서 정한 가격)으로 정산을 받으셨으나, 국영상점에 물건이 텅텅 비었으니 시장가격으로는 딱 그 정도밖에 안 된다. (일러스트2 배경으로 적당한 곳에)다음날 그 도시락통을 들고 간 나는 점심시간에 친구들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이거 우리 아버지가 제대비로 사신 거다. 이거 하나밖에 살 수가 없으시더래.” 그러자 다들 당연하다는 듯 반응했다. “야, 그 정도면 양호하다. 제대비도 받고. 우리 삼촌은 제대할 때 고향 갈 차비도 못 받았다 하던데. 흐흐흐” “군대는 좀 낫네. 사회는 뭐 생활비(월급) 받아본 지가 까마득한데, 제대비도 주고” “아버님이 딸바보시구나” 모두가 그렇게 위로 아닌 위로와 부러움을 섞어 한마디씩 하고 나서 우리는 즐겁게 도시락을 먹었다. 도시락 안에 든 쌀밥과 계란말이, 생선구이, 튀김 등 모든 것은 다 시장에서 구입한 것들이었다. 한국식 PX라 할 수 있는 ‘군인상점’이 있으나, 고난의 행군 이후 군인상점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은 품질 낮은 생필품 몇 개가 전부였고, 그마저도 살 수 있는 수량이 정해져 있었다. 그래도 군인가족은 좀 나은 편이다. 아버지가 군인으로 사는 동안 식량공급은 대체로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100%는 아니고 한 달에 보름 분을 공급할 때도 있었고, 몇 달을 밀리다 한꺼번에 공급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군도 군 나름이어서 민간인과 다를 바 없는 열악한 경제환경에 처한 군인가족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얼마 전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하고 열정과 자부심에 넘치는 생도들과 장교들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아버지를 떠올렸다. 우리 아빠도 북한이 아닌 한국에서 장교 생활을 하셨다면 아마도 지금보다는 더욱 자랑스럽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셨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아빠가 한국에 와서 군인들의 모습을 보셨다면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유튜브에서 육사 생도들의 멋진 화랑의식을 보았다. 화랑의식 Ⓒ 위키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