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덕희 베드로 신부(민족화해센터장) ‘평화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요즘입니다. 전쟁의 위기와 평화의 봄이 수시로 교차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지만, 오늘의 현실은 오히려 극단으로 치닫는 국면에 있습니다.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되는 지금, 평화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져 가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신년 카드에 담긴 '원폭 피해 소년' 사진 전쟁의 결과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그것은 파멸과 잔해만을 남길 뿐입니다. 전쟁의 결과를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5년 전 새해 첫날 ‘세계 평화의 날’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신년 카드에 실은 사진이기도 합니다. 나가사키 원폭 이후 모든 건물들이 사라진 후 한 어린 소년이 서 있습니다. 그곳은 화장장 앞입니다. 이 어린 소년의 등 뒤에는 더 어린 여동생이 고개를 뒤로 떨군 채 업혀있습니다. 소년의 얼굴은 눈물조차 보이지 않는 굳은 표정입니다.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멈추어 버린 그 시간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 사진의 뒷면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전쟁의 결과’(il frutto della guerra) 라고 적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이렇듯 우리에게 상처와 죽음만을 남겨 놓습니다. 지난 4월 민화위에서 주관하는 일본 평화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순례단이 들린 곳은 시모노세키와 히로시마였습니다. 이 두 곳 모두 전쟁의 아픔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입니다. 지금은 전쟁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평화롭고 활기찬 도시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의 기억에서 전쟁의 결과였던 옛 흔적을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아픈 기억임에도 잊을 수 없는 그 이유는 평화의 씨앗이 그곳에서 다시 피어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히로시마 원폭 돔 원자 폭탄의 흔적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원폭돔’의 건물, 이 건물은 전쟁의 상징이자 평화를 찾는 이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건물 주변에 평화기념공원이 자리합니다. 그곳에는 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있습니다. 특히 한국인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희생자들, 이국의 땅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들의 가엾은 영혼을 우리는 평화를 기원하며 그들을 기억하고자 했습니다. 히로시마 기념공원 -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가까운 곳에 있는 평화기념관에는 원폭의 참상들을 보여주는 사진과 기록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평화로운 마음으로는 볼 수 없는 그 참혹한 현장의 기억들을 우리 마음에 되새겨 주는 듯했습니다. 돌무더기만 남아 있는 그날, 그 시간의 순간을 마치 오늘의 시간처럼 바라보며 평화가 사라진 그 순간을 기억 속에 담습니다. 죽음처럼 멈춰 선 시계의 8시 15분, 그 때를 기억하며 평화의 시간이 멈추지 않고 딸깍딸깍 앞으로 나아가기를 기원해보기도 했습니다. 우베 조세이 탄광 수몰지 추모비 순례단이 들린 곳 중의 하나는 우베 조세이 탄광 수몰지였습니다. 전쟁에 필요한 석탄을 채굴하기 위해 천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동원되어 일했던 곳입니다. 해저 1킬로미터 앞바다까지 연결된 지하 갱도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순식간에 밀려 들어온 바닷물로 인해 130여 명이 수장된 곳입니다. 단 한 명의 유골도 발견할 수 없었던 이곳 바다에는 ‘피야’라는 환기통 기둥 두 개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름 모를 그분들을 위해 준비해 간 국화꽃 몇 송이를 바다에 띄워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순례단은 히로시마교구 주교좌 성당에서 그곳 교구장 주교님과 함께 평화를 기원하며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인사말로 시작된 주교님의 말씀은 과거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한 행동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로 이어졌습니다. 과거의 성찰과 진정 어린 사과, 이것이 용서와 화해를 위한 시작이며, 이를 통해서 우리는 평화라는 여정의 종착지에 다가설 수 있음을 몸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히로시마 주교님과 찍은 단체 사진 전쟁의 결과를 우리 눈에서 치워 버린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원폭의 잔해인 돌무더기를 치우고 새로운 건물을 가득 채워 도시를 재건했다고 해서 평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평화는 전쟁이 다시금 발발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과 세상을 평화의 열매들로 채워나가는 일에서 지속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전쟁의 결과’(il frutto della guerra)가 아닌 ‘평화의 열매’(il frutto della pace)를 맺는 평화의 사도로 살아가기를 희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