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현(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장) 윤석열 정부의 대미 외교가 ‘태산명동서일필’(太山鳴動鼠一匹, 태산이 쩡쩡 울리도록 야단법석을 떨었는데 정작 결과는 생쥐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의 형국이다, 전국 길거리에 ‘역대급 성과’라고 플래카드까지 내걸며 자랑하는 외교 성과가 ‘핵협의그룹’(Nuclear Consultative Group)인데 이게 무엇을 하는 기구인지 아리송하다. 2016년 출범해 이미 존재하는 ‘확장억제전략협의체’(Extended Deterrence Strategy and Consultaion Group)와 어떻게 다른지 모호하다. 한미 사이에는 양국의 국방장관이 참여해 군사동맹 전반을 다루는 ‘한미안보협의회’(SCM)와 외교 · 국방 차관이 참석해 미국의 핵 확장억제를 논의하는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가 있다. 이번에 신설될 ‘핵협의그룹’은 차관보급 인사가 참여하는 상설 기구라고 하는데, 상설 협의체이기 때문에 역대급 성과인 걸까? 미국 워싱턴D.C. 의사당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미 상·하원 합동연설을 하고 있다.(2023.04.30.) Ⓒ워싱턴/연합뉴스 한미정상회담의 성과 윤 정부는 대미 외교에 올인했다. 일방적 양보에 의한 한일관계 개선, 대만문제 언급과 우크라이나 무기 수출 발언으로 인한 중국 · 러시아 관계 악화 등도 미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행보로 해석됐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 반도체법 등 미국의 보호무역조치에 대한 국내 기업들의 불만에도, 도청에 대한 험한 국내 여론에도 애써 미국 입장을 두둔했던 것도 바이든 행정부로부터 무언가를 얻기 위한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지난 4월 26일 한미 정상 회담 합의서를 보면 윤 정부의 대미 외교가 애초 목표를 갖고 있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워싱턴 선언’의 의미를 “사실상 미국과 핵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바로 다음 날 미국 국가안보회의 에드 케이건 선임국장이 “우리는 워싱턴 선언을 사실상 핵공유라고 보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에드 케이건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선임국장(오른쪽)이 국무부에서 한국 특파원단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워싱턴/이경주 특파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일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국무회의에서 “한미 ‘핵협의그룹’이 나토 ‘핵기획그룹’보다 더 실효적”이라고 자랑했는데 이 또한 과장이다. 도상 협의만으로 운용되는 ‘핵협의그룹’이 어떻게 실제 유럽 전역에 배치된 전술핵을 운용하고 있는 나토(NATO)의 ‘핵기획그룹’보다 더 실효성이 있단 말인가? 나토는 현재 독일 · 벨기에 · 네덜란드 · 이탈리아 · 터키 등 5개 나라에 미국의 전술핵을 배치해놓고, ‘핵기획그룹’(Nuclear Planning Group)이 기획과 보안 · 안전 · 통제 등의 역할을 주관한다. ‘핵기획그룹’은 암묵적 동의 방식의 만장일치제 의사 결정 구조를 가지고 있어, 비핵국가인 나토 회원국들의 발언권을 보장한다. 하지만 핵무기 사용에 관한 실질적인 권한은 오로지 미국에게 있다. 작전 기획을 미국 4성 장군이 사령관으로 있는 ‘유럽동맹군최고사령부’가 맡고 있고, 핵무기 사용을 위한 암호 코드를 미국이 통제하기 때문이다. ‘나토식 핵공유’란 용어는 작전 기획과 의사 결정을 미국이 담당하고, 나토 동맹국들이 핵무기 배치 시설을 제공하고 투발 임무의 일부를 담당하기에 붙여진 용어이다. 핵무기 운용 경험도 없는 한국이 전술핵 배치도 안 된 상태에서 나토 회원국보다 더 큰 발언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과도한 희망 사항이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의 최대 성과는 역설적으로 선거 때마다 등장해 여론을 호도하는 극우파들의 핵무장 선동의 싹을 없애버린 데 있다. 미국 안보당국자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자체 핵개발 가능성 언급(1월 11일 외교부 · 국방부 업무보고)에 경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맹인 한국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최초로 독자 핵무장 필요성을 발언함으로써 미국 안보정책의 근간인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바이든 행정부는 차제에 한국의 자체 핵개발 논의에 쐐기를 박아야겠다고 작심한 듯 싶다. 그 결과가 워싱턴 선언에 명시된 “윤 대통령은 국제 비확산체제의 초석인 핵확산금지조약(NPT)상 의무에 대한 한국의 오랜 공약 및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 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력 협정 준수를 재확인하였다.”는 문구이다. 윤 정부가 핵확산금지조약과 한미 원자력협정을 준수하겠다고 다짐한 것은 자체 핵개발을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핵확산금지조약에 의하면 NPT 회원국은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 추출과 우라늄 고농축을 하지 않음으로써 핵무기 제조를 포기할 뿐 아니라 외국으로부터 핵무기 반입도 해서는 안 된다. 미국의 협력을 얻어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하거나 한반도에 전술핵을 배치하겠다는 극우 인사들의 주장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이번에 확인된 셈이다. 전술핵을 보유한다고 안보 불안감이 사라질까? 캠프 페이지에 배치된 핵 탄두 미사일 '어니스트 존'. Ⓒ 출처-<시사IN> 인터넷 판 194호 전술핵무기를 갖고 있으면 안보 불안감이 사라질까? 한국에는 오랜 기간 다수의 미국 전술핵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국은 이승만 정부의 안보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1957년 12월 핵탄두를 장착한 어니스트 존 미사일과 280mm 장거리포를 남한에 배치했다. 1970년대 초반 미국의 베트남 철수로 인해 박정희 정부의 안보 불안감이 커졌을 때는 핵무기의 숫자도 증가해 1,000여 개에 이를 정도였다. 한국에 배치된 핵무기가 철수된 것은 1991년 12월 남북한이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채택하기 직전이었다. 1991년 8월 소련이 해체되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전 세계에 배치된 전술핵을 회수하겠다고 공언하고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역사적 경험에 의하면 한국에 전술핵이 배치되어 있을 때도 북한 위협은 여전했고 안보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북한에 대한 불신과 혐오, 끝없는 군비 증강과 미국 · 일본에 대한 안보 의존, 그 반작용으로 북핵 위협 증가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북한에 비해 경제력 57.8배(2021년 기준), 압도적 군사비 투자로 인한 재래식 군사력 우위에 있는 한국이 뭐가 부족해 불안해하며 안보를 외세에 의존해야 하는가? 미국의 확장억제가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동족을 상대로 핵 보복을 애원하는 모습은 민망하지 않은가? 윤 정부는 이제 발상을 바꿔 북핵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평화와 번영을 일구겠다는 중장기 구상을 내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