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원(북한대학교대학원 수료) 탈북민들이 남한 생활을 하면서 갖게 되는 한국에 대한 애정은 어쩌면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보다 더 각별할 수도 있다. 예전에 살았던 북한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도 좋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라떼’로 대변되는 단순한 세대 차이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다. 20대 초반 어린 나이에 북한을 떠나 이젠 곧 50을 바라보는 지인 한 분이 있다. 이분의 한국 사랑은 참으로 각별하다. 특히, 손톱깎이에 관한 얘기를 할 때 나도 모르게 격한 공감을 표현했던 적이 있다. 그분은 한국 입국 초기, 즉 20여 년 전에 선물로 받은 손톱깎이 세트를 여전히 사용하고 계신단다. 지금도 새것처럼 성능이 좋다고 하셨다. 나도 동네 교회에서 교회 로고가 새겨진 손톱깎이 세트를 받은 적이 있다. 지금도 잘 쓰고 있다. 아마도 10년 이상은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의 손톱깎이는 세계 일류 상품이라고 하더니 과연 이름값을 하는 것 같다. 아주 어렸을 적 엄마는 내 손톱을 가위로 잘라주셨다. 얇고 부드러운 어린이의 손톱이라 잘 잘렸던 것 같다. 그러나 어른들의 손톱은 딱딱해져 가위로 자르기가 쉽지 않다. 북한에서는 밤에 손톱을 자르지 않는 관습이 있다. 밤에 손톱을 자르면 도둑이 든다느니, 혹은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느니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꼭 낮에 자르도록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린 손톱이 튕겨버렸을 때 쉽게 찾을 수 없고, 또 늦은 밤 어두운 조명 밑에서 자르다 자칫 손이라도 상할까 염려되어 만든 이야기일 수 있겠다. 여하튼 어렸을 적 들은 이야기여서인지, 아니면 몸에 배어서 그런지 지금도 늦은 밤에는 손톱을 깎지 않는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가위보다 손톱깎이를 더 많이 사용했는데, 날이 금방 무뎌지곤 했다. 특히, 손톱깎이 손잡이 뒷면에 큐티클(cuticle)을 정리하는 면이 아주 부실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중후반 친구가 쓰는 손톱깎이 세트를 보고 감탄한 적이 있었다. 모양도 예쁘고 손톱도 아주 잘 깎였다. 나의 감탄에 친구가 으스댔다. “이거 물 건너온 거야” “하 역시!” 친구의 일본산 손톱깎이와 함께 온 부드러운 깃털이 달린 귀이개도 참 탐이 났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럿이 돌려 쓰는 것이 비위생적일 수도 있지만, 그때는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에 너도나도 한 번씩 돌려가며 써봤다. 북한에는 지금도 손으로 하는 노동이 많다. 바깥일이나 집안일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손을 곱게 관리하는 것도 사치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농장원들과 같이 종일 농사일에 시달리다 보면 손톱을 깎을 필요도 없이 닳아버린다. 북한에는 해마다 ‘농촌지원’이라 불리는 전국적인 노력동원 기간이 있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보통 4월 말이나 5월 초에서 6월 중순이나 말까지 이어진다. 한두 달 남짓한 이 기간동안 중학교 2학년 이상의 학생들과 대학생들, 전국의 모든 회사원과 노동자들이 농사짓기에 동원된다. 전력과 기름이 부족해 대부분 농사일이 인력에 의존한다. 농촌지원을 갔다 오면 얼굴과 팔다리가 까맣게 그을리고 상처가 나 있다. 특히, 손톱은 손톱용 토시를 사용해도 한 달이면 다 닳아버려 심한 경우 손끝이 빨갛게 상처도 생기곤 했다. 농촌지원 기간 다른 방식(물질적 지원)으로 대체하고 집에서 편안히 보낸 일부 동기들을 몹시 부럽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나 너무나 부러워 부모님에게 조른 적도 있었다. ‘나도 농촌지원에서 빠져서 한 달만 집에서 놀면 거머리에 다리가 뜯겨 흉이 지지도 않을 것이고, 손톱도 닳지 않을 것인데 엄마 아빠가 뭐라도 해달라’고 떼를 썼다. 어린 내 눈에 우리 집도 그 정도 ‘능력’은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부모님은 ‘그런 특혜를 바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딱 잘라 말씀하셨다. 그때 상황이 얼마나 서운했던지 여태껏 기억하고 있다. 어느 날 엄마에게 다시 그 얘기를 꺼냈다. “그때 말이야, 북한에 있을 때 말이야. 왜 나를 농촌지원에서 한 번도 빼주지 않았어? 나 친딸 맞어?” 농담 반 진담 반 능청스럽게 말을 꺼냈더니 오히려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왜 신경을 안 썼겠어. 당연히 선생님을 만나 사업을 하려고 했지, 근데 넌 초급단체비서(북한 학교에서 각 학급의 청년동맹 책임자, 초급단체 비서 혹은 초급단체 위원장 아래 학급반장이 있음)라서 안 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냥 내보낸 거지.” 엄마는 당신께서 할 일을 당당히 하셨다며, 미안함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나를 당당히 바라보셨다. “그래? 역시 울 엄마네. 내가 오해했었구나. 나 친딸 맞네.” 지금 생각해보면 혹여 부모님이 사회적 동원에서 빼줄 능력이 된다고 해도 이건 부모님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부할 나이의 어린 학생들을 농사일에 동원시켜야만 하는 북한 자체가 문제다. 여하튼 가능하다면 한 트럭 가득 손톱깎이 세트를 북한에 보내주고 싶다. 모내기를 하고 있는 북한학생들 Ⓒ 자유북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