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원당성당 주임신부) 커피, 참 많이 마십니다. ‘밥 먹고 나면 커피 한 잔’ 하는 문화는 이제 자연스럽습니다. 인스턴트 커피와 프림과 설탕을 둘 둘 둘(셋!) 타서 먹던 커피에서 믹스 커피를 거쳐 이제는 커피 전문점을 찾아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동네 도로 옆에 자리한 드라이브 쓰루 커피 전문점은 아침 7시부터 차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커피)도 흔한 말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난 따뜻한 아이스 커피’라고 말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만큼 커피는 이제 일상이 되었습니다.커피의 확산은 새로운 문화를 가져왔습니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가면 식당들 사이로 카페 하나 정도는 기본입니다. 강릉에는 카페들이 늘어선 커피 거리가 형성되어 유명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생두를 사서 직접 볶는 가게들도 쉽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커피 전문가 곧 바리스타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따는 분들도 있습니다. 신부님들 중에는 바리스타 자격증만이 아니라 커피를 볶는 로스팅 작업까지 직접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커피를 좋아합니다. 카페에 가면 ‘에스프레소’를 달라고 합니다. 10년 전에 이 말을 하면, ‘어 저.. 원액인데 괜찮으세요?’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는 누구도 질문하지 않고 주문을 받아주는 걸 보면서 변화를 실감합니다. 집에서는 볶은 원두를 사다가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먹습니다. 아침과 점심에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일과를 확인합니다. 누가 찾아와도 ‘커피 한 잔 드릴까요?’라는 말이 자연스럽습니다. 동창 신부님을 만나러 가서 ‘커피 한 잔 줘~’가 가장 먼저 나오는 말 중 하나입니다. 사실 이전에는 저녁에도 한밤중에 잠들기 전에도 커피를 마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녁 시간대에 이런 변화가 시작되었는데, 이제는 오후 4시 이후에도 영향을 남깁니다. 바로 커피를 마시면 잠이 안 온다는 것입니다. 좀 늦은 시간에 커피를 마시면 자려고 누워도 잠이 오지 않고, 깊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늦은 오후엔 커피 생각이 나도 참고 물이나 음료수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동네 카페에 원두를 사러 갔을 때 일입니다. 커피를 고르고 계산도 하고 가게를 나서려는데, 사장님의 권유로 공짜 커피 한 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제는 오후 늦게 커피를 마시면 잠이 안 온다.’는 말을 꺼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나이 드셔서 그래요’라는 답을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말을 들었습니다. ‘그건 신부님이 그만큼 안 움직이셔서 그래요. 여기 오는 아주머니들이 그런 말을 하면 전 시장 가서 알타리 한 단 사다 담그세요. 그런답니다. 젊은이들을 보세요. 하루 종일 움직이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커피를 달고 살아요. 여기 시장 상인들도 커피를 종일 마십니다. 그런데 잠 안 온다는 말 하는 사람 없어요. 그만큼 일하고 움직인다는 거죠.’ 충격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었습니다. 바쁘게 사는 이들, 몸을 움직이며 일하는 이들에게서 이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장에서 커피 한 잔 여유롭게 마실 틈 없이 일하는 상인들이 커다란 텀블러 가득 커피를 담아 종일 마시면서 일하는 것도 자주 보았습니다. 집에 들어가 머리만 대면 잠든다는 그들의 이야기도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깊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 그것이 저의 삶에 대한 정확한 평가였습니다. 미사와 성사, 만남과 회의의 짧은 시간 외에는 운동을 따로 하지 않으며 크게 움직이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신자들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도,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신부님, 쉬세요~’입니다. 커피의 카페인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면 외부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 세상이 너무 변했다, 정부의 잘못이다, 이웃이 그런다, 남편이, 아내가, 신부님이 고집쟁이다.’ 이런 말로 자신이 아니라 다른 데서 이유를 찾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제외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나도 그러한 원인의 하나입니다. 내가 움직이지 않고, 내가 변화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안주하고 머물려고만 하는 데에서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남북 관계의 악화와 민족화해 활동의 위축에 대해 여러 원인을 말합니다. 국제 정치와 국내 정치, 언론과 경제적 이유까지 따집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과 정치를 탓하며 우리의 멈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전쟁 반대, 화해와 평화, 공존과 발전에 대해 말하고 앞장서는 데에, 다른 이들을 이러한 움직임과 행동에 동참하도록 초대하는 데에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다른 어떤 정치 세력이나 외부의 요인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멈추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이사 6,8) 다른 이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문제입니다. 다른 이가 아니라 우리가 움직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