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교수) 한반도 분단 현실에서 평화와 종종 혼동되는 개념은 안보(安保)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안보를 대북정책의 기조로 내세우며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해왔다. 안보는 보호해야 할 대상을 전제로 한다. 정전 70여 년의 역사는 이 대상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바로 국가다. 안보의 대상이 국가가 될 때, 평화는 종종 국력, 즉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대변되는 “힘”으로 이해된다. 보호의 궁극적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관심에서 사라질 뿐 아니라, 군사력처럼 도구가 되고 심지어 적으로 간주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렇듯 안보를 중심으로 하는 평화는 과연 그리스도가 가르친 평화에 부합할까? 우리 삶터인 의정부교구 관할구역, 동두천시의 역사를 통해 생각해 보자. 동두천시 보산동 부근에는 “몽키하우스”라 불리는 흉가가 있다. 수십 년간 방치되었던 이 건물은 최근 “소요산 확대 개발 사업 발전방안”의 일환으로 철거 대상이 되어 이목을 끌고 있다. 동두천시에는 한국전쟁 정전 이후 1953년부터 2019년 12월까지 주한미군의 육군기지 캠프 호비 (Camp Hovey)가 위치해 있었다. 정부는 미군들의 편의를 위해 기지 주변을 중심으로 상권 형성을 격려했고 이 중에는 병사들이 “여가”를 즐기기 위해 성매매 여성들과 접촉하는 장소였던 서비스 클럽도 있었다. 낙인과 혐오의 대상인 ‘기지촌’이 형성된 배경이다. 이곳으로 유입된 여성들은 미성년 시기에 이미 (성)폭력과 학대를 받고 극심한 빈곤과 고립 속에 살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인신매매로 끌려온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정부는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애국자” 혹은 “민간 외교관”이라 추켜세우며 성매매를 조장하고 방조했다. 한때 이들이 대한민국 GNP의 25% 이상을 차지하는 등 경제 부양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닉슨독트린 선언 이후 고비를 맞고 있던 한미관계 속에서 주한미군을 존속시키기 위한 구실로도 효과적이었던 까닭이다. 모두 국가의 안보를 위해 행해진 일들이었다. 방송<그것이 알고싶다> "몽키하우스와 비밀의 방" 갈무리 Ⓒ SBS 하지만 국가가 정한 안보의 대상에 미군 ‘위안부’ 여성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기지촌 내에서 여성들은 포주의 착취와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받으며 성매매를 강요당했으며, 기지촌 밖에서는 “양공주”, “양갈보”로 불리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몽키하우스”에 얽힌 이야기는 참혹하다. 정부는 미군 병사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여성들을 대상으로 강제적인 성병 검사와 관리를 진행했다. 매주 2번씩 실시되었던 성병 검진에서 성병 보균자로 진단 받거나 정부에 등록하지 않은 채 미군을 상대하다 적발되면 낙검자(落檢者) 수용소였던 이곳 “몽키하우스”로 끌려와 강제로 격리되어 페니실린 주사 처방을 받아야 했다. 과도한 양의 페니실린을 주사하여 맞는 과정 자체가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쇼크사로 죽는 일이 속출했다. ‘몽키하우스’란 모욕적인 이름은 미군들이 붙인 것이다. 밤마다 수용소 창살을 붙잡고 우는 여성들의 모습이 원숭이 같았던 데다, 페니실린 과다로 허리가 휘어 원숭이처럼 보였다는 이유다. 이 고통을 겪고 살아남지 못한 여성들은 장례 절차도 없이 숫자가 적힌 나무 팻말을 묘비 삼아 무덤에 묻혔다. 방송<그것이 알고싶다> "몽키하우스와 비밀의 방" 갈무리 Ⓒ SBS “몽키하우스”가 드러내는 “안보”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분단 상황 속에서 국가안보는 개개인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폭력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위기의식에 기반하기에, 어떤 사회문제보다 우선하는 성역으로 존재한다. 모든 사회문제가 국가안보를 중심으로 서열화되며 안보와 군사력에 관한 정보는 극소수의 정치인과 군인들만 공유한다. 사회학자 김성경 교수(북한대학원대학교)가 지적했듯, 이러한 구조 속에서 “국가, 남성, 국제, 정치는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그것의 반대항으로 존재하는 사회, 여성, 국내, 일상의 문제를 사소한 것,” 희생되어도 좋을 것으로 폄하한다. 안보는 또한 잠재된 공포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작동되어 국가구성원의 의식과 무의식에 깊숙이 침투한다. 생각의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는 전체주의를 형성하고, “덜 중요한 인간”으로 간주되는 여성과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한다. 안보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미군 ’위안부’ 여성들에 대한 정부의 기만적 태도를 수십 년 동안이나 용인해 왔으며, 그들을 멸시하고 혐오하는 사회적 정서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평화를 위한 것이라 강변해 왔다. 과연 이것이 평화일까? 방송<그것이 알고싶다> "몽키하우스와 비밀의 방" 갈무리 Ⓒ SBS 성서의 예언자 전통과 그리스도가 가르친 평화 구약성서의 예언자 전통과 그리스도가 가르친 평화는 국가안보가 지향하는 평화와 다른 비전을 제시한다. 평화를 일컫는 히브리어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샬롬(שָׁלוֹם)’이다. ‘온전함’이라는 뜻을 지닌 이 단어는 온전한 상태와 관계를 모두 의미한다. 몸과 마음뿐 아니라 도덕적, 영적으로 건강한 상태,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인 동시에,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가 샬롬, 즉 평화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뼈아픈 상실과 고통을 경험했던 포로기를 거치며 샬롬에는 종말론적 미래가 투사되기 시작한다. 산산이 흩어지고 파괴된 참담한 현실 속, 돌아갈 고향이 무너져 버린 상황 속에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샬롬을 선포했다. 이제 평화는 공동체가 함께 간직해야 할 기억이자, 새롭게 건설해야 할 미래가 된 것이다. 종말론적 샬롬이 잘 드러난 구절은 이사야 예언자의 신탁이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 2,4). 즉, 전쟁이 없는 상태뿐 아니라 전쟁을 배우고 익힐 필요조차 없는 상태, 다른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 맺음이 구약성서의 샬롬이다. 단지 무력 갈등이 없는 소극적 평화가 아니라 정치적 억압, 경제적 빈곤, 사회적 차별이 없는 적극적 평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성서가 가르치는 평화는 현대 평화학에서 주장하는 평화와 맥을 같이하지만, 이와 더불어 성서만의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평화의 주도자가 인간이 아닌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야훼 하느님 자신이 평화요, 평화의 소유자요, 평화의 창조자다(시편 85,10-13). 하느님이 사람들과 땅에 주시는 선물이 평화다(욥 25,2; 시편 35,27). 그리고 이 하느님의 관심은 언제나 권력자들이 아니라 양 떼들, 개개인 구성원들에게 향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고통의 책임을 지도자들에게 묻고 그들을 호되게 꾸짖는다. “내 백성의 상처를 건성으로 치료해 주면서 ‘괜찮다’ ‘괜찮다’ 하는구나. 사실은 괜찮은 것이 아닌데, 그렇듯이 역겨운 짓을 하면서 부끄러운 줄이나 알더냐?(예레 6,14).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는 일이라는 게 오늘날로 치자면 국가의 안정, 즉 안보를 내세우며 인권유린, 차별과 학대, 그리고 경제적 강탈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성서는 이들을 불의한 자들이요, 야훼 하느님을 잊어버린 자들이라 표현한다. 신약성서에서 평화를 뜻하는 헬라어는 ‘에이레네(εἰρήνη)’이다. 샬롬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의 탄생 때 등장하는 평화의 노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느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루카 2,1-20)에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으로서 평화가 울려 퍼졌다. 루카복음에서 예수가 이사야서를 인용하며 선포한 평화는 예언자들의 전통을 잇는 종말론적 평화다. 바오로 사도는 분열과 다툼이 없는 공동체의 평화, 예수를 닮고자 하는 이들이 만들어 나가야 할 관계로서의 평화를 강조했다. 이 모든 평화가 통합되는 것이 하느님 나라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서 평화는 하느님 나라와 동의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가 했던 말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복음서 저자들의 눈에 비친 세상의 평화는 권력 찬탈과 식민지 수탈과 압제를 통해 억지로 만들어낸 평화였고, 민중의 고통을 담보로 얻어낸 소수 권력자들의 평화였다. 이 평화는 거짓된 평화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평화란 이러한 거짓 평화에 길들여져 있는 상태를 거부하고,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는 이웃들을 경멸하고 혐오하는 삐뚤어진 관계성까지 바꾸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몽키하우스에서 생각하는 세상의 평화와 하느님의 평화 다시 몽키하우스로 돌아와 보자. 이 슬프고 끔찍한 역사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국가의 안보는 우리 사회 가장 후미진 곳의 이웃 중 한 사람인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목숨과 존엄성을 짓밟고 얻어낸 평화다. 이 평화는 거짓된 평화다. 성서가 선포하는 평화는 인간을 도구화하고 서열화하는 안보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성서의 평화는 생명을 살리는 평화다. 모두 함께 살아가기 위한 평화다. 하느님은 당신이 만든 생명들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신다. 사람이 만든 국가가 아니라 그 안의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국가가 주장하는 “힘을 위한 평화”에 과연 구성원 각자가 삶에서 영위하는 평화가 포함되어 있는지 물어야 한다. 국가안보의 명목으로 무기 생산과 군사훈련을 위한 막대한 예산을 집행하는 것이 과연 예언자들과 예수가 가르친 평화를 위한 것인지, 또 이로 인한 인권탄압과 환경오염과 일상 속 군사주의 폭력문화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 국가안보와 국가 이익을 위해 희생되고 있는 이웃을 돌아보아야 한다. 거짓된 평화가 만들어낸 상식과 규범에 물들어 우리들조차 삐뚤어진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 않는지 성찰해야 한다. 소요산에서 몽키하우스로 올라가는 길 Ⓒ 경기문화재단 '빛과 어둠을 소요하는 시간, 동두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