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근(다니엘) 신부 - 참회와 속죄의 성당 협력사제 우리들은 얼마 전 주님 부활 대축일을 보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부활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6-17)이 말씀처럼 부활은 우리의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가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움이 가득한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요한 20,19 참조) 또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들이 미사 때마다 듣는 말씀을 하십니다.“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여기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예수님께서 주는 평화와 세상이 주는 평화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입니다. 평화라는 단어를 한자로 바꾸면 ‘平和’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전쟁이나 갈등이 없이 평온함’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뜻을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예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두 공동체가 있습니다. 한 곳은 다른 누구보다 싸움을 잘하는 한 명이 있습니다. 누구도 그와 대결하기 위해 덤비지 않는 그런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그 공동체는 싸움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한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서로 대등한 관계로 서로 입장을 드러내며 자주 다투곤 하였습니다. 이 두 공동체 중에 평화가 실현되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눈에 보이는 폭력이 없는 곳일까요. 서로의 주장을 하며 올바른 방향을 찾는 곳일까요. Ⓒ Freepik 여러분들은 어디에 선택하셨는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 말하는 평화는 첫 번째를 추구하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함부로 건들지 말라는 싸인은 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겉으로는 평화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두려움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언젠가는 싸움을 잘하는 사람에게 도전자가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그 중심이 상대방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나에게 있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이나 마음만을 중요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 「지상의 평화」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은 타인들의 필요와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통치자들이 정의의 기준에 따라 합당한 형식과 능력 안에서 자기들의 선행을 봉헌하며 봉사 활동을 해야 한다.”(회칙 「지상의 평화」 53항, 교황 23세) 이 말씀은 평화라는 한자 ‘平和’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平’의 뜻을 보면 평평할 평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눌 편, 다스릴 편’의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和’ 역시도 ‘고를 화, 답할 화, 화할 화’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화하다는 것은 ‘타거나 섞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평화는 서로 나눌 때 이루어질 수 있음을 한자의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和’는 화해(和解)와 화합(和合)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가 말하는 평화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타인을 보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눈은 우리들에게 타인을 보며 그들과 함께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물의 가치는 서로 다르게 드러날 것입니다. “결코 평화가 ‘무기라는 힘’의 균형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한 국가가 원자 무기를 생산하면, 다른 국가들도 비슷한 파괴적 원자 무기를 생산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지상의 평화 110항, 요한23세) 이 말씀처럼 평화는 무기를 통한 전쟁이 없는 나라라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에 만든 무기를 없애고 전쟁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 두려움을 없애야 합니다. 전쟁 무기의 균형은 평화가 영원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안감으로 인한 긴장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상의 평화 113항 참조, 요한23세) 이러한 나약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유다인들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제자들은 더 이상 유다인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있는 두려움과 긴장감은 주님이 주신 평화로 인하여 희망과 용기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느낀 평화는 이후 많은 성인들에게 전달되어 세상에서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의 안식을 희망하며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평화를 이야기할 때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못 박는 병사에게 했던 기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