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원(북한대학교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고등학교 때 우리 반에는 ‘안경쟁이’가 한 명 있었다. 안경쟁이의 사전적 정의는 ‘안경을 쓴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안경원의 상호로도 쓰이는 이 단어가 북한에서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안경 쓴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안경 쓰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경쟁이 친구와 다투다 시빗거리가 떨어지면 상대방은 느닷없이 “이 안경쟁이 주제에!”라는 인신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그러면 안경쟁이는 얼굴이 벌게져서 새로운 욕지거리를 쏟아내는 식이다. 이렇게 학창 시절엔 놀림거리가 되는 안경쟁이가 사회로 진출하게 되면 안경쟁이를 대하는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성인에게 안경쟁이는 더 이상 놀림거리가 되지 못한다. 대학생이나 선생님처럼 ‘지식인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40명 조금 넘는 우리 반에 유일한 안경쟁이는 여자애였는데, 늘 짧게 커트한 머리에 ‘멋’이라고는 전혀 관심 없는 말괄량이였다. 딸 셋 집안의 장녀였지만, 흔히 사람들이 기대하는 장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책벌레였고 공부를 잘했으나, 정말 그것밖에 모르는 친구였다. 이성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학생들과의 인간관계도 서툴렀다. 학교에서 단체로 가는 행사를 제외하고 그 친구가 다른 친구와 놀러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을 만큼 단조로운 삶을 사는 친구였다. 가끔 생각 없이 던지는 서툰 말 때문에 오해를 사 다툼이 생기면 우리보다 두 학년 아래인 그의 여동생이 찾아와 언니 편을 들어주고 갈 만큼 어리숙하기도 했다. 그 친구는 외화벌이로 돈을 잘 버는 아버지 덕분에 우리 학급에서 학생 간부를 맡았는데,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부모도 그 상황을 잘 아는 터라 담임 선생님과 우리 학급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아낌없이 해주었다. 당시 나 역시 학생 간부를 맡았던 상황이라 개학 초기에 여러 번 다툰 적이 있었다. 다투었다기보다 일방적인 질타에 가까웠다. 아무리 부모가 경제적인 후원을 해준다 해도 나는 학생 간부인 그에게 최소한의 역할을 기대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담임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그 학생에게 우리가 기대할 것은 부모의 경제적 후원이다. 그것으로 만족하자. 그러니 네가 그 학생의 몫까지 잘 해줬으면 좋겠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미안해하면서도 너를 믿는다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선생님의 그런 태도에 나는 괜스레 성인이 느낄 법한 책임감을 느꼈다. 선생님의 고충을 이해하고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 있는 든든한 협조자가 된 기분이랄까. 우리 담임은 그런 기분이 들게 만드는 노련한 분이셨다. 졸업 때 우리 학교에 중앙급 대학 여학생 티오 두 개가 배정되었을 때, 강력하게 나를 추천하여 맨 먼저 선택권을 주실 만큼 제자에 대한 책임감 높은 분이기도 하셨다. 현명한 선생님 덕분에 우리는 그렇게 고등학교 내내 학생 간부로 함께했다. 그 ‘안경쟁이’는 우리 학교에서 의대로 진학한 유일한 친구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재력도 든든한 뒷배경으로 작용했지만,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다. 성적순으로 의대를 가는 한국과 달리 북한의 진학 시스템은 성적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 학교에서 1등으로 공부를 잘했던 여학생은 김형직 사범대학(김형직은 김일성의 부친, 중앙급 대학인 김형직 사범대학을 졸업하면 대학교 교원의 자격을 가진다.)으로 진학했다. 나와 그 안경쟁이 친구는 같은 도시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했음에도 대학이 달라 자주 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그 친구 얼굴을 본 것은 대학 2학년쯤 되었을 때다. 정말 우연히 집에 가는 길에 마주쳤는데 멀리서도 안경 쓴 그녀의 얼굴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전히 멋없는 옷차림에 대충 둘러맨 가방, 짧은 커트의 머리 스타일로 헤벌쭉 웃는 그녀의 악의 없는 미소가 반가웠다. 학교 생활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너무 힘들어, 나 요즘 보통을 맞고 다녀.”라며 기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5점 만점에 최우등은 4.5~5점, 우등은 4~4.5점, 보통은 3점대를 의미한다. 나름 공부 잘하는 친구인데, 의대가 힘들긴 힘든가 보다 하는 생각에 응원을 해줬다. “성적이 뭐가 중요한데, 졸업하면 의사 선생님인데. 옛날에 우리 가르쳤던 생물 선생님도 대학 때 보통생이었대. 그래도 선생님만 하시는 데 뭐. 너도 적응하고 나면 고등학교 때처럼 잘할 수 있을 거야.” 따로 약속 잡고 밥 먹을 정도의 각별한 사이는 아니라 그렇게 인사하고 헤어졌다. 나중에 그 친구가 해골 모형을 가방을 넣고 다녀서 가족들과 주변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정도로 흥미를 느꼈다면, 분명 그 친구는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을 것이고, 지금쯤 나름 괜찮은 의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요즘 북한 의사들이 ‘자력갱생’으로 병원을 운영하기 위해 산에 올라 약초를 채취하고, 지역병원 개건·확장 건설에 동원되어 노동하는 일이 빈번한 현실은 안쓰럽지만 말이다. 안경쟁이에 공부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 ‘찌질이’ 취급을 받았던 그 친구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동네의 자랑이었을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