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교수) 예수회에서 설립한 조지타운 대학교 (Georgetown University, Washington DC)의 교과과정 중엔 “마지스 (Magis) 세미나”가 있다. 강의실을 벗어나 고난의 현장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만나고, 그 경험을 통해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정과 의식을 성찰하며, 하느님과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프로그램이다. 14명의 조지타운 학부 학생들, 한 명의 예수회원과 함께 1월 초부터 7주간 한국의 근현대사와 종교의 역할에 대해 공부하고, 봄방학 기간인 마지막 주 3월 2일부터 3월 10일 한국을 방문했다.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방문에 앞선 7주간의 세미나 수업에서는 근현대 한국사와 그리스도교의 사회참여를 반군사주의와 평화주의 시각으로 살펴보았다. 이념대립과 전쟁, 분단의 과정에서 미군정이 끼친 영향, 특히 4.3 항쟁의 배경, 주한미군과 기지촌 역사 등, 미국이 한국사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쳐 왔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을 미국인 학생들에게는 적잖이 불편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마음을 열고 성찰하며 깊이 생각했다. 수업 내용 중 다들 특히 공감했던 것은 ‘다양한 관점의 중요성’이다. 분단과 정전이 만들어 낸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흔히 “주류”로 대변되는 시각 저편 잘 알려지지 않은 삶의 이야기들 – 주변부, “적,” “소극적”인 전쟁의 주체들, 피해자, 평화주의자들의 이야기 - 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전쟁과 군사주의는 직접적인 갈등 상황 뿐 아니라, 일상의 영역에 지속적인 파장과 트라우마를 남긴다는 지적에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이제껏 남성의 시각, 남성적 논리로 대변되는 국제정치의 반경 안에서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았는데, 일본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의 역사를 접하면서 전쟁이 여성과 소수자들에게 얼마나 참혹한 경험이 될 수 있는지, 여성의 서사로는 어떻게 표현되는지 배웠다는 것도 강조했다. 단지 무력 전쟁이 없는 소극적 평화가 아니라, 분쟁과 갈등으로 상처 입은 생명과 땅을 치유하고 전쟁이 필요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적극적 평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 국가와 민족의 틀을 넘어 꾸준한 일상의 변화를 통해 그 평화를 일구어 가야 함을 다들 마음에 새겼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나는, 책으로 배운 역사의 현장을 방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 중에서도 전쟁과 산업 발전과 풍요, 그에 따른 병리 현상으로 한국 사회를 표상하는 대중문화의 친숙한 이미지로는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 작지만 선한 뜻을 모아 삶을 일구고 희망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학생들은 내가 바라고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깊게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역사가 남긴 상처가 가슴 아파 화장실에 들어가 펑펑 울던 모습, 중요한 일정 중임에도 시간을 내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누어 주신 스님께 허리를 숙여 인사하던 모습, 힘들었을 지난 시간의 경험을 솔직하게 나누어 주신 이주민 활동가 선생님께 감사와 존경을 드리고, 선생님 또한 깊은 위로를 받으시던 모습, 고즈넉이 밤이 깊어 가는 파주에서, 따뜻한 기억을 만들도록 마련해 주신 텐트에 옹기종기 모여 정성스럽게 준비한 만찬을 나누며 기타를 치고 아침이슬을 함께 부르던 모습, 4.3 평화공원을 방문하며 폭력과 트라우마로 점철된 역사를 확인하며 깊은 한숨을 쉬고, 또 이해할 수 없는 역사의 반복에 머리를 젓기도 했지만, 강정마을 평화활동가들과 어울리면서는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스스럼 없이 공동체가 되던 모습, 생태중심 대안학교 볍씨학교를 방문하면서는 자기들보다도 나이 어린 학생들이 치열하게 생태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자극과 도전을 받던 모습. 이 모든 모습들이 내게는 오랜 동안 기억에 남아 마음을 설레게 할 평화의 얼굴이다. 그리고 나는, 이 평화의 얼굴이 분명 학생들이 여행 중에 경험한 한국의 모습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속사람들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다고 믿는다. 학생들이 짧은 일정 중에 발견한 한국의 모습은 고통에 대해 깊이 성찰하면서도 친절하고 다정하고 열정적이고 유쾌하며, 사려 깊게 귀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 환대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학생들에게 가장 좋은 면을 보여주고 싶었던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이기는 하다. 연이은 재난과 참사,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정부 관료와 정치인들, 높은 자살률과 노동 불안정, 각박해지는 인심과 경쟁 지상주의때문에 좌절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은, 불과 일주일 동안 학생들이 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학생들이 보았던 한국의 모습은 포장과 가식이 아니다. 상처에 데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에게 분명히 존재하는, 우리가 그리워하며 많이 보고 싶어하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다. 이렇듯 따뜻한 평화의 기억이, 학생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만날 춥고 힘든 시간을 위로해 줄 마음의 쉼터가 되고 따뜻한 불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들이 각자의 삶에서 만들어 갈 평화의 이정표가 되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함께 일상을 바꾸어 나가는 평화 말이다. 낯선 것들에 마음을 열고,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을 주시하고, 판단하기보다 공감하고, 서로 기대고 격려하고 감사하며, 길을 다지고 함께 걸으며 만들어 갈 평화 말이다. 각자가 살아갈 곳에 서려 있을 고통의 기억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성찰로 심화하고 연대감으로 확장하게 하는 평화, 세상의 주류들이 추구하는 승리와 명예, 권력에 관해 의심하고 질문할 수 있게 하는 평화 말이다. 그리고 이 친구들이 다시 한국을 방문할 때는, 이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우리의 모습대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만나며, 서로 닮은 얼굴을 마주하고 웃으며 평화의 인사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수업 준비 과정과 진행을 좀 더 상세하게 담은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게재되었습니다. ‘지금여기’와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의’ 동의 아래, 글의 일부분을 공동 게재함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