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석(베드로) 신부 -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장 20여 년 전, 미국 미네소타주에 있는 세인트폴 미네아폴리스 교구에 파견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춥기로 유명한 그곳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겨울이었는데, 성탄절 다음 날 아침 시내에 있던 종합병원에서 병자성사를 부탁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알고 지내던 아프리카 콩고 출신 신부가 원목으로 있던 병원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다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콩고 신부님이 휴가를 가면서 저에게 응급 상황의 병자성사를 부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차갑게 얼어붙은 도로 위를 달리는데 걱정이 앞섰습니다. 영어가 서툴러서 미사 주례도 쉽지 않았을 때라, 첫 병자성사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병자성사는 위중한 경우 받기 때문에 환자 본인이나 그 가족이 저 같은 동양의 이방인보다는 자기 나라 미국 신부를 선호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병원에 도착했더니 엘리베이터 앞에서 두 사람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명은 전화했던 원목실 직원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스페인어 통역자였습니다. 신부를 요청한 가족이 영어를 못하는 남미 출신 이민자여서 통역자를 대동한 것이었습니다.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함께 병실로 향하는데, 통역하러 온 여자는 다소 당황한 눈치였습니다. 영어와 스페인어를 통역하면 될 줄 알았을 텐데, 영어가 서툰 한국 신부가 올 줄을 몰랐을 것입니다. 좀 어둡다고 느껴진 병실에 들어가니 너무 어려 보이는 이민자 부부와 그들의 죽은 아기가 작은 포대기에 싸여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태어나서, 크리스마스 다음 날 죽은 아기의 엄마는 이미 몇 시간 전에 죽은 아기를 자신의 품에서 떠나보내기 전에 신부가 와서 기도해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위로와 애도의 말들이 오고 가는 가운데, 죽은 아이가 정말 작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병자성사 대신에 죽은 아기를 위한 기도를 해주고 나니까 그래도 아기 엄마에게 무슨 위로의 말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스페인어 통역을 통해 몇 마디를 더듬거리는데,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 참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때 바라본 이민자 엄마의 눈은 제 부족한 ‘위로’를 받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고요해서 더 슬픈 눈빛이었지만, 아마 어린 나이에도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인지, 사제인 저보다 더 깊은 믿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잘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들이 성탄을 축하하는 동안에 자신의 작은 아기를 잃었지만, 어린 엄마는 낯선 한국 신부의 말을 묵묵히 들었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습니다. 미국에서 ‘선교사’로 지내면서 ‘다른 언어’에 대해 묵상할 기회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소통이 잘 안되는 것은 한국말과 미국말이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었고, 말이 통하기 위해서는 서로 이해하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상대를 연민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인류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각자가 너무나도 다른 게 많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일치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1-4) 예수님 제자들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는 사도행전은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다른 언어들로 말하게 되었다고 묘사합니다. 말이 달라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하느님에게 오는 새로운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벨탑의 죄로 인해 갈라졌던 인류가 소통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화해하고 일치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도 74년이 되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매년 6월 25일에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기념하고 있지만, 요즘은 정말 ‘화해와 일치’가 너무 멀게 느껴집니다. 서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 남과 북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적대적인 관계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제 정말 ‘평화의 길’이 설득력을 잃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은총을 믿는 신앙인들은 평화를 위한 교회의 사명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일치의 영은 갈라진 우리 민족을 화해시킬 수 있습니다. 성령강림으로 시작된 우리 교회가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언어로 더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