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교수) [ 팔레스타인 가지지구에서 이스라엘의 보복 공습으로 연기가 치솟는 모습 © AP뉴시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사이의 전면전이 8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작년 10월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공격을 감행한 이후, 이스라엘은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하여 가자 북부에서부터 초토화 작전을 펼쳐 왔다. 하마스 전투 병력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민간인 거주 지역을 무차별 공격하며 주민들을 남쪽으로 내몰고 있다. 이에 따라 주민들 대부분은 팔레스타인 최 남부 이집트 접경 지역인 라파로 피신한 상태다. 라파는 주민들의 생명줄인 구호 물품 수송 통로이기도 한 곳이다. 지난 5월 7일, 이스라엘은 마침내 라파에 지상전을 개시했다. 난민촌에 폭격이 가해지며 연일 민간인 살상이 이어지고 있다(6월 7일 현재 사망자 약 3만 5천 명).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세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전쟁 초기부터 즉각적인 휴전을 호소하며 “어떠한 해결책도 될 수 없는 테러와 전쟁은 단지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넣는다”라고 말했다.(2023년 10월 8일 삼종기도 훈화) 하지만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는 “휴전 협상이 타결되든 무산되든 우리는 라파에 있는 하마스 부대를 섬멸할 것”이라며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편, 4월 18일 뉴욕 컬럼비아대를 시작으로, 가자 무력충돌에서 드러난 기존의 국제질서를 비판하고 억압받는 소수자들을 옹호하는 반전운동이 전지구적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미국 정치권과 언론은 이를 ‘반유대주의 폭동,’ ‘테러 옹호’ 행위로 비난했고, 경찰은 최루탄과 실탄을 사용해 시위 가담자들을 체포하며 강제 진압에 나섰다. 하지만 탄압이 거세질수록 오히려 시위는 확산하는 양상이다. 참가자들, 특히 대학생들은 이스라엘 점령, 정착지 확장 및 군비 물자를 후원하는 기업들의 자본으로 재정을 충당하는 학교 당국을 비판하며, 전쟁이 일부 특권층의 이익을 유지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미국 사회의 심각한 빈부격차와 인종차별 등 구조적 모순에 대한 청년 세대의 문제의식이 시위의 배경에 자리 잡고 있다.반전 집회에서는 “정착민 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라는 용어를 자주 들을 수 있다. 원주민들의 땅과 재산을 빼앗아 새로운 사회를 기획하는 프로젝트를 일컫는다. 팔레스타인 그리스도교 신학자이며 루터교 목사인 미트리 라헵(Mitri Raheb)은 저서 『Decolonizing Palestine: The Land, The People, The Bible』에서 “정착민 식민주의자들은 궁극적으로 원주민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원주민들을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정착민들은 다양한 정치적 메커니즘, 이념, 사회적 서사를 통해 스스로를 원주민으로 묘사한다. 원주민의 땅은 테라 눌리우스(terra nullius), 즉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빈 땅 또는 척박한 땅으로 묘사되어 정착민들의 사유 재산이 된다. 원주민들은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테러리스트로 묘사되며, 정착민들은 문명화되고 용감한 개척자로 그려진다. 야만인으로부터 땅과 재산을 빼앗아 오기 위해 경찰국가가 만들어지고 원주민에 대한 탄압이 정당화된다”라고 주장한다(Raheb, 2022). 라헵은 이스라엘 건국을 주도한 초기 시오니스트들의 논리가 정착민 식민주의에 입각해 있다고 파악한다.서구세계에서 정착민 식민주의의 이념적 기초가 된 것은 시오니즘에 기반한 성경 해석이었다. 유대교 시오니스트들은 자신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성서 속 이스라엘인들과 동일시하며 “신의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전쟁은 신의 계시에 따른 ‘해방’이자 ‘귀환’으로 신성화되었고, 이것이 팔레스타인 영토 약탈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기제로 작용했다. 팔레스타인은 정치적, 종교적, 민족적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정체성과 민족을 포함하는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적 지역을 의미한다. 수 세기 동안 유대인, 무슬림, 그리스도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함께 살아왔다. 반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이름은 20세기에 정치적으로 선택된 이름이다. 시오니스트들은 땅을 독점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여 마치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 항구적으로 존재해 온 민족적, 종교적 국가인 것처럼 왜곡한다. 자신들을 그 땅의 정당한 상속자라 포장하며 원주민들을 사악하고 타락한 존재로 비하하고(창세 9,35), 따라서 추방되고 말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신명 7,2) 이스라엘의 정착민 식민주의에는 그리스도교도 큰 책임이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의 지지가 결합하면서 시오니즘 기획이 탄력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시오니스트들은 유대교 시오니즘을 적극 지원하지만 이념의 뿌리를 유대 민족주의가 아닌 그리스도교에 둔다. 즉,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귀환”이 성경에 기록된 “종말의 전조”이며, 종국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 왕국이 성립될 것이라 믿는다. 그리스도교 시오니즘은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념적 기반이다. 미국의 경우 수천만 명에 달하는 복음주의 신자들이 이스라엘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며, 한국 또한 분쟁지역에서 공격적 선교활동을 해 온 그룹들, 이스라엘 지지집회에 나서는 신자들의 배후에 그리스도교 시오니즘이 있다.라헵은 시오니스트들의 사고방식이 근본적으로 인종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신념이라고 직언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지가 유럽사회에 깊이 뿌리 박힌 유대인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한다. 반유대주의의 오랜 역사 또한 눈감을 수 없으며, 그리스도교 신학이 홀로코스트로 이어진 유대인 학살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시오니스트들의 제국주의적 기획과 그에 따른 전쟁, 팔레스타인 억압 또한 묵과할 수 없다. “홀로코스트인가 아니면 식민주의인가”라는 양자택일적 접근을 거부하고, 유대인 학살의 역사와 팔레스타인 억압의 현실 모두를 동시에 직시하며, 폭력과 증오를 낳은 낡은 신학을 반성하고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과제다. 하지만 그 출발은 성서 해석에 대한 근본적 질문, 즉 “성경은 역사인가 이야기인가?”를 던지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와 식민주의를 낳은 폭력 이데올로기 배후에는 공통으로 문자주의적 성경 읽기가 있다. 유대인 혐오의 오랜 역사와 시오니스트들의 정착민 식민주의는 모두 성경을 “역사”로 파악한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다.성경은 이야기다. 성경을 특정 민족의 역사, 나아가 하느님의 역사로 이해하는 해석학은 종교적 근본주의의 중요한 특징이며,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악용되어 왔다. 성경의 이야기는 특정 민족의 역사로 신성화할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지정학적 분석을 통해 고통받는 약자들에 대한 해방과 위로의 메시지로 읽어야 한다. 성경의 선민사상(選民思想)은 정복과 억압을 합리화하는 이념이 아니다. 제국주의 권력에 짓밟힌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이며, 억압의 현실에 낙담한 이들에 대한 격려이며, 절망에 빠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위로다. 제국주의 질서를 주도하는 이스라엘 국가와 난민으로 전락하여 수십 년 동안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든 처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팔레스타인, 과연 누가 오늘날의 가난한 이들인가?라헵의 비판과 호소는 시오니즘을 지탱하는 왜곡된 신학의 상속자로 자리매김한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지만,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결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정착민 식민주의와 반유대주의는 우리 모두의 공통된 삶과 세계를 파괴해 온 수 세기 동안의 침략과 지배와 우월주의를 대표하는 이념이며, 이는 한반도의 평화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 가자지구에서 대규모 학살이 있었던 2014년부터 2023년까지 10년 동안 5,200만 달러(약 710억 원)어치의 무기를 이스라엘로 수출했다(참여연대 성명, “한국 정부는 이스라엘 무기 수출 즉각 중단하라” 2024년 3월 20일). 특히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반유대주의를 경계함과 동시에 팔레스타인 민중의 고통에 무감각해져서는 안 되며, 이를 가능케 한 그리스도교의 잘못된 유산을 직시해야 한다. 기존의 국제질서를 비판하고 억압받는 소수자들을 옹호하는 행동은 우리 시대 양심의 목소리이며 공동선을 위한 길이다. 우리의 일상이 팔레스타인이 겪는 고통에 대한 책임과 의무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인정하고, 궁극적으로 어떤 공동체도 희생될 필요가 없는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