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형 티모테오 신부의정부교구 6지구장 어린 시절 간혹 발생했던 유치한 다툼들이 생각납니다. 콩나물 시루와도 같던 교실에서 짝꿍을 만나 한 책상을 같이 사용합니다. 사이가 좋으면 같은 책상을 사용하며 학용품도 서로 공유하고 즐겁게 생활하지만, 사이가 좋지 않을 경우 책상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 놓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장난삼아 일부러 경계선을 넘기도 하고, 때론 서로에게 경고성 자극을 주기도 하다가, 감정이 실리기 시작하면 물리적 충돌을 넘어 큰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 어린 시절의 유치함이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 우리네 삶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함을 넘어 불안함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저열한 전단을 날려 보내고, 그것을 오물로 규정한 상대방은 실제 오물을 풍선에 실어 날리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 좋으련만 유치한 다툼이 도를 넘어 결국 중요한 군사합의를 무효화시키고, 접경 지역에서의 무력 충돌 가능성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평화’라는 약육강식의 법칙을 내세우며 엄청난 비용을 들여 무력시위를 강화하고, 상대방은 비대칭 전략으로 핵무기와 장거리 탄도미사일 능력을 고도화시키고 있습니다.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지만, 그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의 삶에 점점 더 극심한 불안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전쟁과 한반도에서의 긴장 고조에 큰 우려를 표명하며 지난 3월 1일 임진각에서 4대 종단 성직자들이 ‘평화 선언문’을 선포하고 20여 일간 평화 순례를 진행하였습니다.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총 400km에 이르는 대장정이었습니다. 오로지 두 발에 의지하여 천리길을 각 종단의 성직자들이 함께 모여 평화를 기원하며 순례에 임했습니다. 때아닌 강추위와 눈보라가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기도 했지만, 사이사이 뜻을 같이하는 많은 분들의 격려와 응원 그리고 동참 속에 무사히 순례의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인류의 전쟁 역사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끔찍한 전쟁들은 종교갈등이 그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크고 작은 종교갈등은 지금도 많은 곳에서 끔찍한 재앙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순례는 서로 다른 종교인들이 함께 모여 ‘평화’를 기원하며 발걸음을 내디뎠다는 데 그 의미가 있었습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배려하며 시간을 보냈다는 것 자체가 ‘평화’의 큰 울림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20여 일간 함께했던 매일의 순례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매일 아침 각 종단의 성직자들이 솔선수범하여 간단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여 서로 나누고, 각 종단 별로 돌아가며 아침기도를 진행합니다. 서로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마치면 순례 준비를 하고 함께 모여 체조를 진행한 다음, 출발 전 간단한 각오와 그날의 지향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는 둥근 원형을 유지한 상태에서 그날 하루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한다는 의미로 상호 간에 큰 절을 바치고 출발합니다. 순례의 기본자세는 침묵과 기도입니다. 50분 정도 침묵 속에 기도하며 걷고, 이후 10분 정도 쉬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전체 일정 중 ‘길 위의 예절’을 각 종단 별로 한 번씩은 실시하였습니다. 길 위의 성찬례, 길 위의 예배, 길 위의 미사, 길 위의 예불 등 서로의 종교의식을 존중하며 마음을 다해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한 다음에는 다시 한번 더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큰절을 하고 하루의 시간을 끝맺습니다. 저녁에 모든 성직자가 함께 모여 동네 목욕탕을 들르기도 하고, 모닥불을 피워놓고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고, 때론 불편한 잠자리일 텐데 모두가 같은 공간에서 서로가 내는 소음(?)을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하기도 하고, 그 모든 것이 아주 특별하게 다가온 시간이었습니다. 긴 일정을 보내면서 종교는 다르지만, 성직자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하며 보내는 그 상황을 어느 스님은 ‘화엄세상’같다 표현하였습니다. 화엄세상이란 서로 다른 꽃들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낙원의 세상을 일컫는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우리 신앙에 있어 하느님 나라 혹은 천국에 해당하는 표현인 듯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순례가 시노달리따스(함께하는 길)의 실현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며 생각했습니다. 평화의 길이 길고 먼 여정일지 모르지만, 한발 한 발 내딛다 보면 어느 순간에 그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우리 신앙인은 평화의 가치를 폄훼하고 세속화하는 모든 시도에 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평화는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평화는 사랑을 통해 얻어질 수 있습니다. 이 복음적 진리를 마음 깊이 간직하고 평화의 사도로서 함께 살아갈 것을 다짐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