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 (조지타운 대학교 교수/우리신학연구소 연구원) 멀리서 바라보면 많은 것들이 극단적으로 보인다. 내가 살고 있는 미국에서 느끼는 한반도 긴장 상황에 대한 위기감은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의 몇 배는 될 것이다. 판문점 북쪽에서 오물 풍선이 날아오고 남쪽에서 대북 확성 방송을 재개하면 미국의 언론은 당장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반응한다. 남북을 비롯하여 동북아 긴장 상황이 어느 때보다 첨예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나에겐 그런 보도 행태가 불편하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삭제되고 전쟁만 남기 때문이다. 고통을 전시하는 자극적인 이미지와 보도들에 익숙해진 우리의 눈과 귀는 전쟁과 재난이 몰고 오는 참상 아래 묻혀 있는 사람들의 삶을 잘 보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너무 쉽게 옳고 그름을 가르고, 아군과 적군을, 승자와 패자를,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한다. 그리고 ‘우리’와 반대편 범주에 있는 이들을 서슴없이 일반화하며 악마화한다. 물론, 전쟁에 원인을 제공하는 이들은 분명히 있다. 발생부터 경과, 피해자 지원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특정 집단 혹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하며,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실질적 피해를 입고 삶이 파편화되는 경험을 하는 많은 민간인과 군인들의 삶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분법적 구도는 모호해진다. 전쟁은 결국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의정부교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와 청소년사목국이 주최한 ‘청년 피스쿨’ 프로그램 (파주 6.26-28 /오키나와 7.21-23)을 통해 방문한 일본의 최남단 오키나와는 바로 그렇게, 전쟁은 모두의 삶을 망가뜨린다는 사실이 과거와 현재의 시간에 아로새겨져 있는 곳이다. 2차 세계대전 종반, 일본은 미군이 일본 본토로 진격하는 속도를 늦추기 위해 오키나와를 총알받이로 삼았다. ‘오키나와 전투’로 알려진 이 잔혹한 전쟁을 통해 오키나와 인구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12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 비극적인 역사는 수 세기 동안 계속되어 온 식민역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오키나와는 원래 류쿠왕국을 중심으로 본토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화와 종교를 갖고 있었다. 1879년 일본은 류쿠왕국을 강제로 병합하고 동화정책을 시행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오키나와는 본토인들에게 땅과 문화를 빼앗긴 채 비인간적인 차별적 대우를 감수해야 했다.오키나와의 비극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1951년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일본에 주권을 돌려주었지만, 동아시아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오키나와를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오키나와에는 대규모의 미군이 남았고,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의 항공모함과 같은 역할을 했다. 오키나와는 1972년 일본에 반환되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주둔 미군을 감축할 것이라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70%가 넘는 주일본 미군기지가 일본 전체 영토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에 아직도 밀집되어 있다. 늘 전쟁의 위협 속에 놓여 있는 오키나와에는 미군의 범죄와 사고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오키나와현의 통계에 따르면, 1972년부터 2019년까지 약 6,000건의 강도·강간·살인 등의 주일미군 범죄가 발생했고, 미군의 교통사고로 4,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다. 미군 항공기가 추락하거나 비상 착륙하는 사고 또한 빈번하게 일어나며, 기지로 인한 환경 오염도 심각하다. 미군 훈련 중에 불에 탄 초원은 3,817만㎡에 달하며 (경향신문 2017. 10. 16), 기지 주변의 수자원에서는 독성화학물질이 검출되었다(동포신문 2023. 8. 19). 우리는 2박 3일의 일정 동안 오키나와 토박이 세토씨의 진심 어린 안내를 받으며 비극의 땅을 걸었다. 세토씨는 오키나와 온나손 지역 역사 되살리기 작업과 더불어 박물관을 운영하며 다수의 평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평화운동가이다. 오키나와 평화공원, 히메유리 박물관, 치비치리 가마, 한의 비, 가데나 기지와 헤노코 신기지, 슈리성을 포함하는 여러 방문지 중에서도 내 마음에 특히 아프게 남은 곳은 오키나와 전투 당시 집단 자결이 벌어졌던 ‘치비치리 가마’이다. 미군을 피해 동굴로 숨어 들어온 주민들은 “살아서 치욕스럽게 연명하느니 영광스럽게 죽으라.”는 천황의 말에 따라 자결을 택했다. 미국인들은 도깨비이며, 미군에게 잡히면 여성은 강간당하고 남성들은 총칼로 찢겨 죽는다는 소문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84명의 사망자 중 절반 이상이 어린아이들이었고 이들은 부모에 의해 칼에 찔리거나 돌에 맞아 죽었다. 죽지 못해 포로로 잡혀 살아남은 이들은 평생 끔찍한 트라우마와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치비치리가 아닌 다른 동굴에 피신했다가 미군의 회유를 받아들인 다른 주민들은 구조되어 살아남았다. ‘집단자결’이라기 보다 ‘집단 강제사’라 해야 할 치비치리 가마의 비극에서 전쟁 그 자체, 그리고 그 전쟁을 지속시키는 도덕적으로 파산한 지도자들 외에 과연 누구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이렇듯 무너진 삶의 자리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도 무의미하며, “반일,” “반미” 등 혈연 중심의 민족적 정서에 기반한 정치적 구호도 무색하다. 생명과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만 구분되어야 할 뿐이다. 히메유리 유적지의 슬픈 이야기 또한 모두를 피해자로 만드는 전쟁의 광폭함을 증언한다.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작전이 시작되자 ‘오토히메’ 현립고등학교 여학생들과 ‘시라유리’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학생 200명은 부상병의 간호와 식사, 시신 후송 등의 업무에 동원되었다. 사격이 비처럼 쏟아지던 6월 18일 갑작스러운 해산 명령을 받은 학생들은 어찌할 바 모르며 전장을 헤매고 도망가다 자결하거나 포탄에 맞아 죽었다. 대부분의 친구를 잃고 살아남은 한 생존자는 그날 밤의 악몽에 대해 “수십 년 동안 아무에게,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라”고 한다. 그가 잠겨 있었던 거대한 침묵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세상의 모든 전쟁 속에서 죽어간, 혹은 살아남은 수많은 이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공명한다. 전쟁은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들, 피해 숫자와 통계가 담아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상처를 남긴다. 인류 모두에게 말이다. 히메유리 박물관 오키나와를 어둡게 하는 전쟁의 그림자는 일본 정부와 미군의 헤노코 기지 건설로 오히려 깊어지고 있다. ‘미군에게 가장 중요하고,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기지로 알려진 후텐마 기지 이전을 요구해 온 오키나와 주민들의 투쟁에 일본 정부는 결국 헤노코 신기지 건설로, 이전이 아닌 확장으로 응답했다. 헤노코 신기지 주변의 바다는 이미 접근금지선으로 갈라져 있고, 그 안에는 콘크리트와 철근이 들어앉았다.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이들은 평화를 위해, 바다 생물과 산호 보존을 위해, 또 오키나와의 내일을 위해 공사 차량이 드나드는 길목에 앉아 노래를 부르며 저항한다. 그럼에도 공사장 주변 해변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그 천진한 풍경 위에 제주 강정 앞바다와 구럼비 바위가 겹친다. 모였다 ‘치워지기’를 반복하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모습에서는 강정을 지켜온 사람들이 겹친다. “생명이야말로 보물!” 오키나와 사람들이 절규처럼 외쳐 온 말이다. 류쿠왕국의 쇼 오타이 왕이 1879년 메이지 정부에 나라를 넘기는 과정에서 남겼다고 전해지지만, 이 말은 평화를 지키는 모든 현장에서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전쟁과 압제, 식민과 군국주의로 점철된 역사 속에서 오키나와인들은 총보다 꽃, 죽음보다 생명, 전쟁보다 평화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배웠다. 미국인의 신분으로 1981년 오키나와에 방문했다 결국 오키나와에 남아 나하교구의 주교가 된 웨인 번트 주교님 (Bishop Wayne Francis Berndt, O.F.M. Cap)을 끌어당긴 것은 바로 그 생명과 평화의 힘이었다. 고통과 상처의 역사 속에서 피어났기에 더 간절하고 아름다운, 연약해 보이지만 질기고 튼튼한 그 힘. 주교님은 그 안에서 복음의 가르침을 찾았다. “평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묻는 우리의 질문에 주교님은 “평화란 차별이 없는 상태입니다” 하고 답하셨다. 오키나와인이건 본토인이건, 일본인이건 미국인이건 한국인이건, 남쪽에 살고 있건 북쪽에 살고 있건, 국적과 인종과 성정체성과 능력과 이념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상을 바라보는 것,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진 하느님의 숨, 생명을 살아내고 지켜내는 것, 바로 그것이 주교님이 말씀하신 평화 아닐까. 헤노코 해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