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교수)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고 표현한다. 복음서의 여러 장면에서 이 표현을 볼 수 있다. 그분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군중들을 ‘가엾게’ 여기셨다. 무릎 꿇은 나병 환자의 간절한 바람을 들으면서도, 하나뿐인 자식을 잃고 넋이 나간 과부에게 “울지 마라” 하면서도, ‘가엾게’ 여기셨다. 홀로 외딴곳에 머무르기 위한 발걸음까지 쫓아온 군중을 외면하지 않으셨던 까닭도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도 이 표현이 등장한다. 강도 당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초주검이 되어 길바닥에 늘어져 있는 이를 보며 사마리아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예수님 당신의 마음이다.* “가엾은 마음이 들다”라는 표현은, 희랍어 동사 “σπλαγχνίζομαι” [splagchnizomai, 스플랑크니조마이]를 우리말 정서에 맞게 의역한 것인데, 원문의 의미를 잘 담지 못한다. 이 동사의 어근은 “σπλάγχνα” [splánchna, 스플랑크나]로, 내장, 장기를 의미한다. 원문의 느낌대로 표현하자면 “내장이 뒤흔들릴 정도로 깊이 느끼다” 정도가 되겠다. 새끼를 잃은 어미 원숭이가 수백 리 길을 쉬지 않고 따라오다 창자가 끊어져 죽었다는 사연의 고사성어 단장지애 (斷腸之哀)가 떠오른다. 그러니 예수님이 당신 앞에 간절하게 모여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가엾은 마음”을 품으셨다는 말은 ‘동정심이 든’ 정도가 아니다.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아프셨다는 뜻이다. 자식을 잃은 어미처럼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는 뜻이다. 가엾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의 주제인 ‘그리스도인의 평화’와 연관시켜 보자. 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 “샬롬” (שׁלום/shalom)은 전쟁과 폭력의 부재가 아니라 “온전한 상태”를 의미한다. 즉, 회복과 상생이 이루어져 하느님의 마음에 부합하는 상태가 평화다. 온전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감각은 온전하지 못한 상태를 감지하는 감수성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 온전하지 못한 세상을 살아가는 한, 이 세상을 가엾게 여기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전쟁과 재난, 폭력의 세상을 살아가며 아무런 불편함도, 내적 저항감도, 안타까움도 느끼지 못하는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과 거리가 멀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에게 ‘평화 감수성’이란 세상의 상처, 모든 생명에 대한 고통을 아파하는 마음을 포함한다. 오늘날의 세상은 평화, 즉 온전한 상태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3년째, 가자지구에서 2년째 계속되고 있는 전쟁은 종전은 고사하고 오히려 확대되어 간다. 세계 각처의 전쟁과 기후재난으로 말미암아 고향을 잃은 난민은 나날이 증가하는데 국제사회의 시선은 갈수록 차가워진다. 한반도 긴장 또한 갈수록 첨예해지며 일촉즉발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제는 북측도 남측을 “적국”으로 선언했다. (남측은 오래전부터 북을 “주적”으로 규정해왔다) 파국의 세계화가 이렇듯 심각한데 소셜미디어는 성공과 행복, 멋지고 안락한 삶을 자랑하는 화려한 이미지들이 범람하고, 어떻게 하면 빠르고 효율적으로 행복을 생산하고 소비할지, 고통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가르치는 강연들이 인기다. 작년 즉위 10주년을 맞는 자리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언급했던 “무관심의 세계화”가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는 어떻게 울어야 할지, 어떻게 연민의 마음으로 살아갈지” 잊어버렸다. “슬퍼할 능력,” 하느님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2014년 람페두사 연설 중). [ 전장에 나온 우크라이나 노병 ] 영국의 철학자이자 활동가인 사라 아메드 (Sara Ahmed)는 『행복의 약속』에서 "불행할 권리"를 주장한다. 아메드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행복은 좋은 것'이라는 전제를 유보하고, 우리가 행복이라고 믿는 것들이 실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들이라고 지적한다. 행복은 내면적 요구에 따라 추구하는 개인의 가치가 아니라 사회적 기대와 규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며, 그 결과 사람들은 무비판적으로 이러한 사회적 기준을 받아들이고 이에 걸맞은 행복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기준을 의심하고 쉽사리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정서 이방인” (affective aliens)으로 간주된다. 소위 ‘갑분싸,’ 갑자기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행복의 기준에서 벗어나려 하기에 불행을 느끼지만, 아메드는 이 불행을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으로 보지 않는다. 즉, 불행은 개인의 실패나 결핍으로 비롯된 절망적인 감정 또는 극복해야 할 상태가 아니다. 행복의 조건을 강요하는 사회적 요구에 맞추어 살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이며, 행복이라는 미명 아래 감춰지는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저항이다. 나아가 불행한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의 고통을 느낄 줄 아는 평화 감수성이며, 이들과 연대하는 적극적인 정치 행위이다. 이러한 “불행할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우리는 행복이 과연 무엇인지 새롭게 생각해볼 기회를 얻게 된다. 전쟁과 재난 상황과 같은 정치적 불안정이 심해질수록 “행복”에 대한 갈망은 더욱 강박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다. 우리는 행복이 채워지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며 순간적이고 강렬한 감각적 쾌락에 집착하고, 남 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이미지들을 만들고 전시하는 것에 삶을 소비한다. 우리의 불행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며, 행복의 기준으로부터 동떨어진 이들을 멸시하고, 나와 다른 생각과 삶의 방식을 가진 이들을 향해 혐오와 배제를 무한증식 시킨다. 이 악순환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할까.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불행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사회가 규정한 행복을 좇기보다 오히려 그 기준을 신앙과 함께 분별하며 “불행할 권리”의 의미를 알아채고 택해야 하지 않을까. “러시아, 우크라이나 또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치열해서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겠느냐.”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요즘 폭발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 한강이 기자회견을 거절하며 했던 말이다. 작가는 가장 “행복”해야 할 순간에 세상의 관심과 찬사에서 물러나 “불행할 권리”를 택했다. “다만 지금처럼 글을 계속 쓰고 싶다”라는 작가의 조용하지만 서늘한 목소리에, 살아있는 것들의 고통과 억압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마침내 고통의 육화가 되어버린 『채식주의자』 영혜의 독백이 겹친다.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채식주의자』중에서) * 마태 9,36; 마르 1,41; 루카 7,13; 마태 1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