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원(북한대학교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내 나이 20대 중반, 생애 처음으로 담근 김장 김치의 양은 자그마치 300㎏이었다. 고등학생 때도 가끔 김치 담그는 엄마를 옆에서 거든 적은 있었지만, 오롯이 혼자 해내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인터넷이 없는 북한이라 네이버에 물어볼 수도 없고 나는 어깨너머로 봤던 엄마의 레시피를 곰곰이 생각해냈다. 그리고 배추 300㎏을 김치로 만드는 일을 단 하루에 끝내기로 맘먹었다. 먼저 산같이 쌓인 배추를 다듬어 소금에 절여야 한다. 최소 이틀 정도 절이는 것이 좋다는 어른들의 조언을 얻어, 그렇게 하기로 했다. 친구를 부를 수도 있었는데 그때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오기가 생겨 혼자 해보기로 했다. 어쩌면 앞으로 남은 내 생의 일들을 대부분 홀로 헤쳐나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한 반발이었던 것 같다. 배추와 무를 다듬다 방심한 찰나에 그만 식칼이 손등을 스쳤다.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있는 흉터를 볼 때마다 나는 그때의 섬뜩함과 망연자실을 기억한다. 그러나 당시엔 나를 걱정해 줄 사람이 옆에 있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대충 상처에 붕대를 감은 다음 다시 김치 재료를 다듬었다. 소란스러움을 눈치챈 옆집 할머니가 우리 집에 들어와 보더니 혀를 차셨다.“아이구, 혼자서 하는 거냐? 당장 시집가도 되겠구나. 어쩜 이리 야무질까!” 그렇게 배추를 절이고 나서 양념을 만들었다. 젓갈을 체에 밭쳐 생선의 뼈와 살을 분리해 내고 남은 액젓에 고춧가루와 마늘, 생강, 사카린 등 각종 조미료를 섞어주었다. 하이라이트는 단연 그 양념에, 소금에 살짝 절인 명태를 넣어주는 것이다. 배추가 절여지는 이틀 동안 젓갈 속 명태도 약간의 맛이 들어간다.그렇게 모든 김장 준비를 마치고 김치를 넣어 둘 50리터짜리 플라스틱 통들을 뜨거운 물에 씻어 말려주었다.김장 당일 새벽에 깬 나는 고무장갑으로 무장하고 절인 배추를 씻기 시작했다. 수돗물이 나오는 호수를 큰 대야에 꽂아놓고 절인 배추를 쉴 새 없이 흐르는 물에 흔들어댔다. 그렇게 배추 300㎏을 두세 번씩 씻고 나니 벌써 점심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밥을 먹을 새도 없이 다시 양념 버무리기에 들어갔다.한 잎 한 잎 양념을 발라 포개고 맨 바깥 잎으로 한 포기 전체를 감싸준 다음 용기에 한 돌기씩 쌓아 올렸다. 중간중간 1/2, 혹은 1/4로 잘라놓은 생무도 한 돌기씩 넣어줬다. 양념에 무채를 넣는 것보다 나는 무를 통째로 넣는 것을 좋아한다. 김치를 한 포기씩 꺼내 먹다가 무가 발견되면 무만 꺼내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채썰기, 깍둑썰기 등 자르는 방식에 따라 금방 채김치, 깍두기로 변했다. [ 2021년 11월 14일 노종신문에 게재된 평양 룡성구역 화성동 4인민반원들의 김장 풍경 사진 ] 초심자의 행운이랄까. 그해 김치는 정말 맛있었다. 아버지는 물론 우리 집에 놀러 오신 아빠 친구분들과 옆집 할머니도 혼자 담그더니 너무 맛있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친구들도 먹어보곤 네가 담근 게 맞냐고, 김치 장사를 해도 되겠다고 호들갑을 떨 정도였다. 김장 김치 담그기에 자신감을 얻는 나는 그 이후로도 탈북하기 전까지 수년간 혼자 김장 김치를 담갔다. 아빠와 나, 두 식구가 먹기엔 너무 많은 양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음 해부턴 100㎏으로 줄였다. 김장 김치 300㎏을 혼자 담근 그해는 군대를 갔다가 제대한 후 엄마 없이 맞이하는 첫 겨울이기도 했다. 국경 지역에 있는 친정으로 여행을 떠나셨던 엄마는 소식이 끊겼고, 다른 사람의 연락을 통해 엄마가 탈북했음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엄마는 체제 순응적이었던 아빠와 나에게 자신의 결심을 터놓기가 꺼려졌던 것 같다. 내가 담근 김장 김치 300㎏은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떠난 엄마에 대한 야속함과 앞으로 내가 가장으로서 짊어져야 할 책임에 대한 중압감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어 택한 육체노동이었던 것 같다. 이미 아빠는 은퇴한 상황이었으므로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가 당연히 가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무사히 도착한 엄마가 수년 뒤 연락해 왔을 때 다행히도 아빠와 나는 엄마 없는 현실에 적응해 나름 잘살고 있었다. 몇 년 후 엄마의 간곡한 권유와 도움을 통해 나 또한 한국으로 왔다. 20대 후반, 적지 않은 나이에 대학교에 입학해 10년 가까이 어린 친구들과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학교 수업과 영어 학원, 스피치 학원, 아르바이트, 그렇게 숨돌릴 틈 없이 정신없는 나에게 엄마가 말했다. “잘살고 있는 너를 여기로 데리고 와 괜히 고생시키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여기는 희망이 있으니까 분명 훨씬 좋은 미래가 있을 거로 생각했어.” 내가 답했다. “엄마, 10년만 기다려줘. 10년이면 앞으로 내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초공사 쌓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그 당시엔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을 못 했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환경에서 한참 늦은 출발선에 서 있는 내 자신의 미래가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앞만 봐야 했고, 그렇게 10년 동안 차곡차곡 기초를 다져갔다. 회사에 취업하고 첫 월급을 받던 날 엄마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엄마 한국에 데려와 줘서 정말 고마워. 엄마가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와서 느꼈을 그 외로움과 두려움, 삶에 대한 용기를 미처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해.” 그날 우리 모녀는 한국에 와 처음으로 울고 웃으며 서로의 수고를 위로했다. 며칠 전 친구가 시댁에 불려 가 배추김치 10통을 담갔다고 엄살을 부렸다. 나는 한껏 코웃음을 쳐주었다. “그까짓 열통.” 친구가 발끈했다. “너는 열통을 담글 수 있냐?” 내가 답했다. “그걸 힘들게 왜 해. 100% 국산 재료로 맛있게 만들어 파는데.” 하하하. 그리고 덧붙였다. “필요하다면 10통이 아니라 100통도 담그지. 누구나 닥치면 다 하게 돼 있어. 그니까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 ♣ 2020년부터 ‘평화의 길’과 ‘민족화해 하늘지기’에서, 북한에서의 추억과 문화 등을 정겹게 들려주신 장혜원 님의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소중한 글은 북한 사회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작가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2025년부터는 ‘토마스 머튼의 평화론’을 주제로 한 김동희 신부님의 연재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