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석 베드로 신부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장 얼마 전 강릉에서 특별한 미사를 봉헌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되었던 고(故) 심재선 씨의 유해 봉환식에 참여하고, 프란치스코 세례명을 가진 고인의 위령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 측에서 전해준 심재선 프란치스코 형제님의 삶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일본 강제 징용자 심재선 프란치스코님 © Global Biz News ] 강원도 명주군에서 태어난 심재선 씨는 스무 살이 되던 1943년 3월, 갑자기 찾아온 경찰관과 면사무소 서기로부터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청년 심 씨는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아들이 가지 않으면 대신 아버지가 가야 한다”는 위협에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섰다고 합니다. 명주군에서 모인 200여 명은 기차로 부산까지 이동했고, 이어서 관부연락선 곤론마루(崑崙丸)를 타고 시모노세키로 향했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심재선 씨는 스미토모 센류(住友潜竜) 탄광에 배치되었으며, 이후 심 씨는 단게사 탄광(일본철강 오가세(大加勢) 탄광으로 추정), 기타마쓰우라군(北松浦郡) 일대의 여러 탄광(나카시마(中島) 탄광, 다이노하나(鯛之鼻) 탄광, 후쿠시마(福島) 탄광, 간바야시(神林) 탄광, 요시노우라(芳之浦) 탄광, 사자(佐々) 탄광)들을 전전했습니다. 강제 동원 당시 면사무소 서기와 함께 온 탄광 노동감독관은 “임금은 하루 5엔이며, 일주일에 하루는 반드시 쉬게 해주고, 쌀밥은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습니다. 임금은 2엔 50전이었고, 쌀밥은커녕 평소에는 고구마만 나왔으며, 가끔 제공되는 죽에도 쌀알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갱내에서 일본인 광부나 노동감독관으로부터 가해지는 폭언과 폭행은 끊이지 않았고, 굴진 같은 작업은 매우 위험했기에 강제 동원자들은 매일 죽음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특히 위험한 현장은 언제나 조선인들이 맡았는데, 낙반, 가스 폭발, 수몰, 석탄차 폭주 등으로 조선인들은 매일같이 죽어갔습니다. 낙반 사고로 동료가 죽어도 석탄과 함께 석탄차에 실려 나갔을 뿐,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열악한 작업 조건과 학대를 견디지 못했던 심 씨는 마침내 탈출하여, 조선 출신 동포가 경영하는 함바(飯場: 일용직 숙소)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오시사(大志佐), 사키토(崎戸)에서 갱외의 토목 현장을 거쳐, 오무라(大村) 비행장의 함바에서도 일했습니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비행장 공사는 중단되었습니다. 8월 15일, 오무라에서 해방을 맞이한 심 씨는 히라도(平戸)에서 귀국선을 기다렸으나, 귀국선을 노린 해적이 제주도나 대마도 근해에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져 귀국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또한 장남이었던 그는 가족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돈을 가지고 귀국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타마쓰우라군(北松浦郡) 내의 중소 탄광에서 필사적으로 일했습니다. 해방 후에도 조선인들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위험한 탄광 일을 계속했던 심재선 씨는 결국 큰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주요 갱도에는 낙반 방지를 위한 철골(아치)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석탄차를 타고 갱도에서 올라올 때 안전모 램프가 아치에 걸려 밴드가 끊어지지 않은 채 말려 들어가는 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승강기 운전자가 멈추지 않아 순간적으로 배와 다리가 뒤틀리며 "뚝" 하는 둔탁한 소리가 몸에 전해졌고, 심 씨의 몸은 석탄차 위로 쓰러졌습니다. 들것에 실려 다카시마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오랜 입원 생활을 견뎌야 했습니다. 큰 사고로 건강이 망가졌지만, 산재를 인정받지 못한 심 씨는 이후 허리 통증을 참아가며 갱외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1986년 12월, 폐광으로 직장을 잃게 됩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로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살아가던 심 프란치스코 형제님은 결국 2007년 1월, 나가사키현의 연립주택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가족 없이 홀로 지내던 그에게는 일본 천주교 신자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다카시마 지역 노동조합 대표를 지낸 야마시타 나오키 씨를 비롯한 지인들과 고가쿠라 성당 신부님의 도움으로 장례미사가 봉헌되었으며, 유해는 성당 납골당에 모셔졌습니다. 독실한 신자였던 일본 지인들은 매년 고인을 위한 위령미사를 정성껏 봉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야마시타 씨는 “죽으면 나를 고향 땅에 묻어달라”는 심 씨의 유언을 잊지 않았습니다. [ 나가사키 니시마치 성당 © Global Biz News ] 짐작할 수 있듯이, 심 씨의 유해를 한국에 모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선한 일본인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이들의 노력을 지켜본 한국 측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심 프란치스코 형제님의 유해를 강릉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몸이 불편해 이번에 한국에 방문하지 못한 야마시타 나오키 씨는 평소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일본의 국가 범죄”라고 하면서, 심재선 씨의 사례를 “두 번째 강제연행 피해자의 모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참된 평화를 위한 화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가톨릭 교회는 “상호 용서가 정의에 대한 요구를 묵살해서는 안 되며, 진실에 이르는 길을 막아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와 반대로, 정의와 진실은 화해에 필요한 실질적 조건들이다” (「간추린 사회교리」 517항)라고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진정한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한일 양국의 선한 사람들을 기억하며, 이 땅의 평화를 위해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