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관 요셉 신부천주교의정부교구 원당성당 부주임 지난 12월 3일에 있었던 계엄령은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일이었다. 상식을 넘어선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사람들이 국회의사당으로 몰려가서 다 함께 불의한 계엄령을 막아낸 모습은 그래도 이 나라가 막장으로 치닫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시민의식을 칭찬하지만, 그 대단한 시민의식을 가진 국가에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어쩌면 정치에 관해서 함부로 말을 하면 안 되는 문화가 지금의 사태까지 이어지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 명절에 할아버지 댁에 가면, 어른들끼리 정치가 주제로 꺼내지면 서로 싸우기 다반사이기도 해서 중간에 손자들끼리 나가서 놀다 오곤 했다. 어느 날 뉴스에서 명절에는 정치를 주제로 이야기하지 말라는 아나운서의 말이 나오기도 했다. 어른 중에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늘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어른들의 그런 문화는 나에게도 정치 이야기는 하는 것이 아님을 학습시켜 주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으로 늘 지적됐지만, 모두가 그런 문화 속에 젖어 들어서인지 나도 사람들과 정치와 사회문제를 주제로 토론은 하지 않는 것이 상식처럼 여겨진 것 같다. 하지만 정치에 관심이 있어야 하고,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 민주시민으로서 국민으로서 책임감 있는 행동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했었다. 게다가 민주주의인 대한민국에서는 많은 사람은 정치를 주제로 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욕구도 분명하게 있다. 하지만 이 주제로 대화했을 때 불쾌했던 경험이 많아서인지, 사람들은 점점 자신과 의견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정치 얘기를 한다. 빨간 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이야기하고 파란 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만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싸우지 않은 채 정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은 민주 시민으로서 정치에 관심이 있다는 윤리적 당위도 충족되고 정치에 관해 얘기하고 싶은 욕구도 채우게 된다. 그러다 보니 다른 의견에 대해서 알 기회가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주장과 근거에 대해서 알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성급한 일반화일 수 있지만, 우리가 정치를 주제로 이야기할 때, 인물과 정책 중에서 더 많이 이야기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어떤 정책에 관해서 윤리성과 실효성에 중점을 두고 판단하려고 했다면,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어떤 근거를 가지고서 그러한 주장을 하는지 분석하고 더불어 상대의 의견과 요점이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정치를 주제로 대화하면 어떤 정치인이 못된 사람이고 부도덕한 사람이며 종북이거나 친일파라는 말이 가장 많이 오고 갔을 것이다. 어떤 정당이 부자들 편만 든다는 이야기와 어떤 정당에 간첩이 있다는 이야기가 주제가 된다. 정치에 대한 건전한 분석은 뒤로하게 되니 남는 것은 편 가르기뿐이 되었다. 나와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을 적으로 돌리고,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하지도 않고 설득되는 것을 굴복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상대방의 의견과 협의하기 위해 양보하는 사람을 배신자로 여기게 된다. 설득할 생각도 양보할 생각도 없으니, 토론은 형식적이며 제 생각을 관철하는 것에서 끝난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금 재고하지 않는다. 단지 상대가 멍청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확신만 커져 단죄하려고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치를 주제로 이야기할 때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내가 누구 편인지만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한번 내가 누구 편인지 정했으면 내 편이 설령 악이라고 할지라도 상대편이 더 큰 악이라고 생각하며 제 생각을 굳히면 된다. 그 결과로 가식적으로라도 중립적 태도를 보여야 하는 신문사들, 방송사들보다 대놓고 편파적이고 검증되지 않는 내용으로 이야기하는 극단적인 유튜버들의 말이 더 신뢰가 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들은 그저 사람들 입맛에 맞는 더 자극적인 말들로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끄는 사람일 뿐이지만 그들이 맛있는 말을 해주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믿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멍청하거나 악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그 사람들을 치워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평화는 상대가 절멸되었을 때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극단주의자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혐오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가 이루어지게 된다. 사람이 중립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힘들다. 실제로 중립적인 사람조차 다른 사람이 보기엔 다른 쪽으로 치우쳐져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 대화를 하지 않으면, 사람의 주장과 근거를 이해하기 어렵다. 한반도에서 평화를 바란다고 외치는 사람은 많지만 같은 대한민국 국민끼리도 대화할 생각이 부족하다. 정치 이야기를 하면 분명 그 모임에서 그 자리에서 평화가 깨질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랑의 기본 덕목이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이다. 내 생각을 바꾸는 것은 회개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작은 모임에서,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이 평화를 깨는 일이라고 한들, 오히려 그런 자리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을 더 잘 실천하는 장이 될 것이다. 그 자리의 평화는 깨지겠지만, 사회 전체가 누리게 되는 평화는 더 지속될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우리가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정치 이야기를 쉽게 하는 문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