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희(모세) 신부천주교의정부교구 덕소성당 협력사제 이번 달에는 『머튼의 평화론』 제1장 ‘평화는 종교의 책임’을 소개하려 한다. 머튼은 책의 서두인 이곳에서 이 책의 목적을 간략하게 밝힌다. “도덕적 진리의 빛에만 의지하여 핵전쟁의 문제를 판단해 보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두괄식이다. 두괄식은 자기주장의 결론이나 요지를 글의 서두에 위치시키는 서술 방식이다. 독자가 필요한 정보의 요지나 결론을 손쉽게 판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실 제1장에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 하고픈 이야기들의 얼개와 주요 제재가 모두 등장한다. 수동적 체념 또는 극단적인 혐오 머튼은 핵폭탄과 전쟁에 대한 당대의 가장 흔한 그리스도교적 반응을 수동적 체념 또는 극단적인 혐오의 태도로 묘사한다. 그간 이 문제에 관한 신학적 윤리적 논의들은 핵무기의 자의적 사용에 대해 부도덕하다고 말하기를 주저해 왔다는 것이다.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은 핵전쟁을 ‘정당한 전쟁’ 이론에 입각해 설명해 왔는데, 이는 머지않아 일어날 핵전쟁을 체념적으로 염두에 두고 여기에 어느 정도 제한된 정도에서 정당성을 갖는지를 수동적으로 해석해 왔다는 것이다. 아울러, 핵전쟁을 점차로 용인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공산주의라는 ‘거악’을 막기 위해 핵전쟁이라는 현실적 방안을 ‘차악’으로 고려하는 태도라 하겠다. 공산주의와는 도무지 공존 불가능하다는 혐오적 시선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머튼이 핵전쟁의 문제를 도덕적 관점에서 먼저 숙고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핵무기의 존재를 당연시하고 현실로 받아들이는 냉전의 위기론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렇게 되면 핵전쟁은 하나의 합리적인 선택으로, 핵 억지력은 ‘평화를 보전’하는 데 있어 적어도 사용 가능한 한 가지 방법으로 여겨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통상적으로 이러한 때에는 도덕적 문제는 적합한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뒷전으로 밀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핵 억지력을 국제정치의 기본전제로 받아들이지 말자 냉전의 적대감에 사로잡힌 세상에서 머튼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크게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당장 평화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평화를 생각하는 것이 진실로 가능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를 위한 첫걸음으로서 “핵 억지력을 국제정치의 기본전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현실 논리에 내쳐지지 않는 도덕적 관점의 토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머튼이 무조건적 비폭력 평화주의로서 전쟁을 반대한다거나 전면적이고 즉각적인 군비철폐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그는 방어전의 상황과 같은 ‘정당한 전쟁’이 일어날 경우를 염두에 두고 핵무기의 무차별 사용이나 ‘제한적 핵 선제공격’을 가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전술 핵무기’ 또는 ‘제한전’ 등의 개념은 참혹한 전면적 핵전쟁을 피하기 위해 고안된 ‘현실적’ 방안이다. 하지만 엄중한 전쟁 상황에서 전쟁을 소규모로 제한한다는 것은 아예 전쟁을 없애는 것만큼이나 엄청난 자제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냐고 묻는다. “제한된 전쟁을 추구하기보다 온전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더욱 그리스도교 정신에 맞고 더욱 인도적일 뿐만 아니라 더욱 현실적인 것처럼”보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군비철폐의 개념을 힘의 정치 게임에 있어 단순한 외교적 수사나 체제 선전용이 아니라 진지한 고려 대상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전면적이고 즉각적인 군비철폐 주장은 현실을 도외시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군비철폐를 “점진적 조치를 통해 달성할 수 있는 목표로서 상당히 진지하게 또 객관적으로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머튼은 그 길에서 “오류나 실패의 위험이 분명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가능한 한 현실에서 어떻게든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문한다. 협상을 위해 만나고 대화하는 일이 수월치 않겠지만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을 무릅써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머튼은 말한다. ‘우리에게는 여유가 없다.’ 전쟁은 ‘불가피한 현실’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이다 1장을 마무리하며 머튼은 말한다. “전쟁은 맹목적 정치세력이 만들어 낸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적대적 냉전 상황과 핵전쟁 담화는 그냥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것을 내가 용인했기에, 수동적 체념으로 받아들였기에, 또 그 안에서 파괴적인 혐오를 키워나갔기에 우리의 현실로 자리 잡은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머튼은 그렇게 된 까닭을 이렇게 밝힌다. “왜냐하면 전쟁 그 자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려는 욕구와 태도에 우리가 맹목적으로 어쩔 수 없이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머튼은 수동적 태도도 하나의 선택이라는 점을 명료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그렇게 해서 또 다른 선택이 우리에게 가능함을 말하려는 것이다. 제2장 ‘우리가 평화를 선택할 수 있는가?’는 그것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