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찬 나보르 신부천주교의정부교구 법원리성당 주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시몬 베드로는 대답한다. 이 질문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그저 들은 내용이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것 인양 대답할 수는 없다. 예수님은 나의 생각, 나의 고백을 듣고자 하신다. 그 답은 막연한 생각 속에 추상적으로 머물러 있는 그런 응답은 아닐 것이다. 바로 지금 오늘의 살아 있는 나의 응답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당신이 하는 일을 내게 알려 주시오. 그러면 당신이 무엇을 믿는지 알려 주겠소.’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신앙인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설파하는 세계관이나 종교적인 교리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우리가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지, 우리가 어떤 일에 힘을 쏟는지 등에서 드러난다."-『가문비 나무의 노래 中』 하루 중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무슨 생각을 많이 하는지를 살펴보면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도 될 수 있다. 선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악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고 세속의 물든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한국인의 유튜브 평균 이용 시간이 2시간을 넘는다는 기사를 보았다. 주일 미사 강론에서, 내가 누구인지 상대가 누구인지는 서로 만났을 때 스마트 폰을 켜서 유튜브 첫 화면을 보면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바로 알 수 있다고 말해 한바탕 웃은 적이 있다. 웃픈 현실이지만 유튜브 화면을 조금만 스크롤 해보면 그 사람의 사상과 정치 이념, 관심사와 종교까지도 한눈에 알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예전 초코파이 CM송이 떠오른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지금 내 스마트폰의 유튜브 첫 화면이 나의 정체성을,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말해주는 기준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은 현실판 ‘벌거벗은 임금’의 아둔함으로 나라와 백성이 분열되고 하느님 자녀들마저 갈라서는 모습이 너무나 개탄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부활 판공성사 공동 보속 중의 하나는 유튜브 절제하기다. 좀 더 자세히는 유튜브를 열었을 때, 적어도 손가락으로 꼽히는 순위 안에 천주교 신앙 관련 콘텐츠가 하나라도 뜨게 하라는 것이다.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어르신들의 경우에는 자주 검색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참고로 주일 미사 복음은 루카 복음 6장 말씀이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루카 6,39-42)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주님 안에 머무를 때 가능하다. 그럼에도 지금의 우리는 어디에서 행복의 이유를 찾고 만족해하는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고, 그들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누구인가?’ 에제키엘 예언서 말씀으로 글을 마친다.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너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에제 18,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