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희(모세) 신부천주교의정부교구 2지구장 전쟁의 대결 상황에서 우리는 전쟁 승리를 위해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는 구호를 쉽게 만나게 된다. 하지만 머튼은 묻는다. 그렇게 해서 도대체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머튼의 평화론 제9장은 이와 연관된 그리스도교 내부의 다양한 신학적 논의들을 두루 검토한다. 두 달에 걸쳐 꼼꼼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1. 핵 억지력과 ‘적절한 방위 태세’를 옹호 하는 입장 - 존 코트니 머레이 신부 핵전쟁을 정당화하지는 않지만 핵 억지력과 ‘적절한 방위 태세’를 옹호하는 신학적 견해들은 강력하다. 미국의 예수회 사제이자 저명한 신학자인 존 코트니 머레이 신부가 이를 대표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펼치기에 앞서 교황 비오 12세를 인용하면서 다음의 몇 가지를 전제한다. 1) 핵전쟁은 그 무제한적 폭력성으로 말미암아 국제분쟁을 해결하거나 정당한 보복을 위한 적절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 2) 어느 국가의 전쟁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전쟁을 비롯한 국제 문제를 조정하고 해결할) 국제공동체의 정치적 발전에 큰 장애가 될 것이다. 3) 모든 핵무기 개발 활동을 도덕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 전쟁은 마지막 수단으로 진짜 엄격히 규정돼야 한다. 그는 윤리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에서 핵 문제가 유례없이 복잡하고 심각하다는 점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또 오늘날 전쟁의 파괴력을 고려할 때 전쟁을 진짜 마지막 수단으로 더욱 엄격하게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으로 방어 전쟁만이 허용될 수 있을 뿐 보복을 위한 전쟁 권리는 없으며,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모든 침략 전쟁은 도덕적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가톨릭의 전쟁 교의는 ‘경계선 상의 도덕’, 즉 본질적으로 비이성적인 전쟁 행위를 최소한의 이성에 의거해 인간적 행위로 만들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전쟁에 관한 가톨릭 사상이 ‘더욱 전통적이고 더욱 건설적인 전제’로 회귀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아울러 전쟁의 책임을 정부나 장군들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도 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국가정책의 도덕적 방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2) 핵무기에 의한 방위 정책은 논리적 도덕적으로도 인정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의 현실적 위협과 호전성의 심각성으로 인해 일말의 협상 가능성도 보이지 않기에 핵무기에 의한 방위 정책이 논리적으로 필요하고 도덕적으로도 인정될 수 있다는 것, “불의를 퇴치하기 위해 벌이는 방어 전쟁은 원칙에서나 현실에서나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다.”는 것이 머레이 신부의 결론적 입장이다. 요컨대 그는 비폭력 평화주의와 호전주의, 양 극단 사이의 중간 입장으로서 전통적인 가톨릭 교리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비오 12세에 의해 재천명된 가톨릭의 ‘정당한 전쟁’의 조건을 그는 이렇게 요약한다. - 전쟁이 진실로 방어 전쟁이어야 한다.- 어떤 협상도 불가능한 상황이어야 한다.- 전쟁이 초래할 해악이 전쟁으로 얻을 선익에 비해 과도하지 않아야 한다.- 무력 사용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지 않도록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 (3) 토마스 머튼의 평가 머튼 역시 오늘 핵무기를 둘러싼 논의들이 윤리적 이성적 관점에서 참으로 복잡하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머레이 신부가 그러한 관점에 치중하여 우리 시대의 위기를 영성적(신앙적)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은 것에 크게 아쉬움을 표한다. 아울러 저자는 머레이 신부의 집필 동기와 이론적 합리성은 인정하지만 그의 주장이 오히려 모든 핵무기 개발 활동을 도덕적으로 정당화시켜 준 것은 아닌지 반문한다. 머튼은 먼저, 공산주의자들과는 절대로 협상할 방도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머레이의 핵심 전제에 대해 이 문제가 과연 아무런 협상도 불가능한 것인지, 상대를 지나치게 악마화하여 전쟁 방지를 위해서는 핵무기로 위협하는 길밖에 없다고 너무 쉽게 결론 내리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핵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는 양 진영의 인사들이 서로 협상할 방도를 반드시 찾아야 하고, 만일 그러한 협상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전제해 버린다면 치명적인 오류가 될 것이라는 것이 머튼의 평가다. 나아가 도덕적인 입장은 고려치 않고 호전적으로 흐르는 현실 정치권력을 염두에 둘 때, 또 군사 전략가들이 윤리 신학자들처럼 그렇게 섬세하게 문제에 접근하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무력을 강행해서라도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개념이 도대체 어떤 결과를 맺을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영국의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인 맥리비 신부의 말을 빌어 핵무기가 “실제로는 도덕률에서 요구되는 분별력을 가지고 사용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최후의 수단으로 또 자위의 목적으로 사용된다 하더라도, 부도덕하게 쓰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