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하 바오로 신부천주교의정부교구 일산성당 부주임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었던 그날의 복음을 묵상하며 며칠 동안 한 단어가 마음에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평화’였습니다. 그 단어를 생각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평화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신다는 평화는 무엇인지 쉽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대체로 이렇게 이해합니다. 다툼이 없고, 서로가 조화를 이루며, 삶이 안정되고 편안한 상태. 관계가 원만하고 큰 문제가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부릅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묵상하다가 조금 다른 질문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왜 하필 평화였을까. 믿음도, 사랑도, 희망도 아닌 왜 평화였을까! 그 질문이 오래 마음에 머물렀습니다. 복음 속 제자들의 모습은 평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문을 모두 잠그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 속에 숨어 있고, 스스로를 지키기에 급급한 상태입니다. 그들 안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기억들이 남아 있습니다. 도망쳤던 순간, 부인했던 말,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이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 한가운데로 예수님께서 들어오십니다. 문이 열려 있어서가 아니라, 문이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 장면을 묵상하면서 조금씩 알 것 같았습니다. 평화는 이미 준비된 상태 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화가 전혀 없는 자리 한가운데에서 먼저 건네지는 선물이라는 것을. 그래서인지 예수님의 평화는 우리가 생각하던 평화와는 다른 결의 평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가 없어서 오는 평화가 아니라,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함께 계시는 분 때문에 가능한 평화. 상황이 정리되어서 얻는 안정이 아니라, 정리되지 않은 삶 속에서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는 분 안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설명하기보다 경험되는 것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그 평화가 곧 자비와 용서로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실패를 먼저 묻지 않으십니다. 다만 평화를 건네시고, 그들에게 용서를 맡기십니다. 그렇게 용서받은 사람들이 다시 용서를 시작하게 됩니다. 어쩌면 평화는 모든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상태가 아니라, 다시 관계를 시작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를 다시 바라보게 하고, 닫혀 있던 마음을 조금씩 열게 하는 힘. 그렇게 생각해 보면, 평화는 멀리 있는 어떤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지고 있는 은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아직 충분히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묵상해 봅니다. 요즘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쉽게 판단하며, 쉽게 거리를 두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관계보다 자신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돌아보면 그 모습은 더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멀리 중동의 땅에서는 여전히 갈등과 폭력이 이어지고 있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상처는 쉽게 봉합되지 못한 채 남아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지도자들의 말 한마디와 선택 하나가 사람들의 삶과 관계를 크게 흔들어 놓는 장면들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의 세계 분쟁의 흐름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향한 불신과 분열이 얼마나 쉽게 깊어지는지를 다시 보게 됩니다. 그렇게 세상은 여전히 불안과 긴장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이 문을 잠그고 있던 제자들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도 주님은 오십니다. 문이 닫혀 있는 자리, 서로를 향한 두려움과 상처가 남아 있는 자리,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그 자리에도 조용히 들어오셔서 같은 말씀을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의 그 말씀이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이 세상 모든 곳에 번져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