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희 안젤라(연세대 정치학 박사수료) 북한의 붉은 자본가의 등장 북한에 시장이 형성되었다는 소식이 처음 한국 사회에 흘러들었을 시기는 1990년대 중반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배급체제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였다. 북한 주민들이 생존 자구책의 일환으로 ‘장마당’이라 불리는 길거리 시장이 형성되었다. 장마당의 범위는 점차 커져 북한 주민의 일상에 자리 잡았고, 한국 사회와 외부에서는 북한이 자본주의로 진입할 수 있는 맹아가 형성되었다고 기대했다. 이후 북한의 시장은 점점 확장되었고, 지금은 ‘돈주’라 불리는 거대 자본가 계층이 생성되었다. 이 돈주라는 행위자들은 북한의 모습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역할을 맡고 있다. 예컨대 현재 북한의 물류와 유통을 돈주들이 담당하고 있으며, 포터와 트럭을 통해 북한 지역의 3대 시장 지역이라 분류되는 평양, 신의주, 청진의 물자를 대규모로 운반하기도 한다. 평양에서 가장 최신식 건물이 즐비한 미래과학자거리가 조성되는데 이 돈주들의 자본이 뒷받침되었다. 새로운 계층의 등장, 붉은 자본가라고도 불리고 부르주아라고도 통용될 수 있는 이들이 북한에 이미 자리 잡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북한 경제의 흐름은 돈주들의 자금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北 경제 큰손 '장마당' 갈무리 ⒸKBS 남북의 창 북한 시장에 대한 기존의 기대 자본가의 등장은 정치·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북한의 정치체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미래 방향이 어찌 나아가게 될 것인지 여러 시사점을 남긴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 쉽게 부르주아의 등장은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촉진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테다. 이러한 이유는 프랑스의 봉건제를 무너뜨리는 데에 당시 부르주아가 가장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며, 현재까지도 봉건 시스템 혁파의 교과서적인 사례로 논의된 까닭이다. 더불어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 없다”라는 문구로 유명한 베링턴 무어의 저서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이 한 시대를 풍미한 배경도 작용한다. 이런 까닭에 북한에 시장이 등장하고 큰손 자본가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북한 붕괴론과 같은 희망적 사고와 맞물려 논의되기도 하였다. 자본가들이 북한의 권위주의적인 체제에 대항한 정치세력화가 될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더불어 더 이상 북한 주민의 경제적 삶을 책임지지 못하는 북한 정권에 대한 북한 주민의 반발과 저항도 커질 것이라는 전망 역시 제기되었다. 북한의 화폐가치가 절하되어 달러나 위안화로 시장 대금이 거래되기도 하는 등 북한의 사회·경제적 환경은 장마당의 확장으로 이전과 다른 면모를 보이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2002년 7.1 조치 이후에 북한에서 정책적으로 법적으로 승인하면서 장마당이 대규모적으로 확대되었다. ⓒKBS 남북의 창, 北 경제 큰손 '장마당' 갈무리 문제는 고난의 행군 이래 북한에서 제한적으로 체제 내 시장화를 허용하게 된 지 이제 20여 년이 지났지만 북한 권위주의 체제의 지속성은 유지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한국 사회를 비롯해 외부에서 기대한 이 돈주들의 현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거쳐야 할 정치세력화도 섣부른 전망이었다고 평가될 만큼 관찰되지 않는 상태다. 대북제재로 북한의 외화난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 돈주들은 중국을 대상으로 재화를 유통해 오며, 북한 경제가 제한적이고 최소한으로라도 유지될 수 있게 활동하는 중이다. 북한 시장에 대해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 돈주들의 기원을 찾아보면 이들은 처음부터 북한의 주요 엘리트를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이다. 한국 사회로 따지면 소상공인으로 분류되는 북한의 마을이나 지역에서 활동하는 상업종사자가 아닌 실제 북한의 유통 구조의 축을 담당하는 이들은 북한 주요 권력층의 자제 혹은 북한의 당, 내각, 군부 등 주요 기관에 속해 있거나, 이 기관들이 관리하는 이들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도 활동하지만, 정권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이 결부될 때 가장 큰 이익을 얻게 되는 부류들이다. 자신들의 경제적 활동을 뒷받침해주는 북한 정권이 지속되어야만 자신들이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도 조성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맨해튼에 빗대어 평해튼이라고 불리는 평양 여명거리. 북한에서 구할 수 없거나 부족한 건축 자재의 조달을 돈주들이 책임졌다고 알려졌다. ⓒ평양/로이터 연합뉴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북한의 붉은 자본가는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자발적인 시장 활동을 통해 몸집과 규모를 늘려온 행위자들로 보기 어렵다. 외려 북한 정권이 이들이 시장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정책적이고 전략적으로 체제 유지를 위해 재화와 자본을 몰아준 특혜층이라고 해석하는 게 알맞을 것이다. 돈주들이 당국의 통제를 벗어날 기미가 보이면, 돈주에게 부여한 경제 활동 권한이 제한되거나 다른 이에게 경제 활동 관련 허가가 이전되는 등 돈주는 언제든 교체될 수 있다. 이른바 후견인-피후견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북한의 지도자가 내부의 주요 기관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이들에게 주어지는 경제적 권한이 상이하게 나타난다. 군을 북한 장악의 최우선 집단으로 생각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경우 군에게 경제 활동 권한을 가장 많이 몰아준 반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는 기존에 군부에게 과도하게 주어진 권한을 당으로 이전했다.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 중국에서는 삼개대표론(三個代表論)이라 하여 기존에 중국 정치체제에서 당에 포섭하지 않았던 자본가 집단을 받아들였다. 자본가가 봉건제를 타도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이끈 주요 행위자로 활동한 서구식 모델과는 다르게, 중국에서 이들은 권위주의 체제에 포섭되어 자신과 체제의 이익을 동시에 도모하면서도 기존 체제에 순응하고 그 안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보장받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이미 앞서 보여 준 중국 사례와 중국 모델과 가까워지는 북한의 현재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 동양적 맥락에서 쉬이 맞아떨어지지 않는 서구식 모델만을 상기하여 북한의 미래를 섣불리 예견하기보다, 현재의 북한을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북한과 남한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대안을 찾으라는 점을 제시한다. 상대방이 망하기만을 바라는 붕괴론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외부에서 북한에 관여할 방법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북제재를 우회하여 북한 경제에 진입할 수 있는 여러 상상력과 두려움 없이 거침없게 상상을 실현할 추진력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