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멀어져 가는 남북

이기헌 베드로 주교전 의정부교구장 언젠가 다시 남북 관계가 좋아지고 여행객들에 대한 행동 지침이 좀 더 유연해지는 날이 와서 평양을 다시 가게 된다면, 몇 가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장충성당] 첫 번째는 장충성당에 조용히 앉아 오랜 시간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평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까지 한번 다녀오고 싶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면서 펼쳐지는 풍경을 감상하고 스쳐 지나가는 마을들도 정겹게 보고 싶습니다. 세 번째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평양 시내 거리를 조용히 걷고 싶습니다. 걸어가면서 그들이 같은 고향 사람임을 새삼 느끼고 싶습니다.그리고 하나 더 말하자면 옥류관에 가서 평양시민들이 먹는 냉면을 먹어 보고 싶습니다. 평양시민들이 먹는 냉면이 외국인들이 비싸게 사 먹는 냉면보다 더 맛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실현되기가 쉬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동안 한국천주교는 남북 관계가 좋을 때도 있었고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끊이지 않고 북한과의 교류를 이어 왔습니다. 북경에 파견된 의정부교구 신부가 한국천주교주교회의와 북한의 조선카톨릭교협회 사이의 연락 창구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이러한 교류는 사실상 중단되었고, 북한과 교류하던 국내 여러 단체의 활동 역시 멈추게 되었습니다. 남북 교류라는 전선에 어둠이 드리워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어둠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확고하게 굳어진 듯합니다. 북한은 2023년 12월 30일 남한을 더 이상 동족이나 통일의 상대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라고 규정했으며, 더 나아가 ‘불변의 주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을 접하면서 언제가 장충성당에 앉아 기도하고, 평양 거리를 걸어보겠다는 저의 소망은 이제 실현되기 어렵겠다는 절망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아픔은 한반도의 어두운 미래입니다. 왜 북한은 이러한 극단적인 선언을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배경에는 국제정세와 군사적 긴장도 있겠지만, 북한 체제의 존속과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이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북한은 세계에서 유례없는 강력한 통제로 철저한 봉쇄 정책을 펼쳐 왔고, 주민들에게 특히 남한에 대해서는 미 제국주의의 압제에 신음하며 가난으로 고통받는 나라로 세뇌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거짓이었음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부터 4~5년 동안 기근과 식량난으로 수많은 아사자가 생긴 ‘고난의 행군’이라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습니다. 국가의 배급이 끊겼고, 주민들은 생계를 위해 중국으로 식량을 구하러 다녔고 정권은 주민들에게 장마당을 허용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식량뿐 아니라 외부 정보도 함께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드라마와 영화, K-팝 등을 통해 남한의 눈부신 발전과 상상하지 못한 남한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와 행복과 부유함을 북한 주민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남북 관계에도 따뜻한 빛이 비쳐 2000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평양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대통령의 연설은 통일에 대한 희망과 남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 시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 연합뉴스설명] 남한 문화를 몰래 접하는 세월이 오래 지속되자 북한 주민들, 특히 젊은 세대들은 남한 말투와 문화들을 모방하고 즐겼습니다. 북한 정권은 이러한 흐름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 2020년에는 '반동문화배격법'을 제정했고, 2023년에는 '평양문화어보호법'을 제정하는 등 외부 문화의 유입을 강하게 통제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는 처형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보면, ‘적대적인 두 국가 선언’은 군사적 · 외교적인 이유뿐 아니라, 북한 주민들의 남한 문화에 대한 동경과 통일에 대한 희망을 근절시키기 위한 최후의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중 11주일 복음 말씀에는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의 시작은 이 측은지심에 있었습니다. 이제 남북 관계 안에서도 예수님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대화의 문이 닫혀가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자비와 연민이 이 땅에 머물기를 기도해야 합니다.언젠가 다시 장충성당에서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평양의 거리를 걸으며 같은 민족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희망하며, 우리는 예수님께서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한반도를 보실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드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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