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발걸음

이은형 티모테오 신부천주교의정부교구 총대리 2026 북중미 월드컵이 ‘스페인’의 우승을, 대장정을 마무리했습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 기대가 많았던 만큼 아쉬움도 컸던 대회였습니다. 월드컵의 성적에 따라 환호하는 해당 국가들 국민의 모습을 보며 지난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가 떠올랐습니다. 개인적으로 60여 년의 삶을 살아오면서 가장 아쉽게 여겨지는 것 중 하나가, 그 ‘4강 신화’의 뜨거웠던 분위기를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브라츠크(Bratsk) 성 키릴로와 메토디오 가톨릭 성당] 저는 2002년 러시아, 그것도 시베리아 북쪽 지역의 작은 도시 ‘브라츠크’에 있었습니다. 월드컵의 분위기를 20인치 작은 TV 화면을 통해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러시아 ‘동시베리아 성요셉 교구’에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파견된 첫 해, 교구청이 자리하고 있는 ‘이르쿠츠크’라는 도시에서 러시아어 교육을 받고, 그 이듬해 북쪽으로 600km 떨어진 ‘브라츠크’에 파견되었습니다. 그 도시에는 2주 만에 지어진 작고 아담한 조립식 성당이 있었고, 가톨릭 교우들은 40여 명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낯선 도시에서 유일하게 조선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북한에서 온 벌목공들로서 체제를 이탈하여 시베리아에서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떠돌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었습니다. 말은 통해 반가웠지만, 초기에는 경계심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심각한 병환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러시아 신자들을 통해 도움을 주었고, 병원에서 그 병간호를 정성껏 해준 덕에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관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성당에 초대하기도 하였고 명절이면 숙소에 모여 간단하게 음식을 준비하여 함께 차례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1년여를 생활하고 난 후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그들이 마련한 송별 모임에 함께 했습니다. 아쉬운 마음 가득 담고 송별 모임이 끝나갈 때, 그 일행 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신부님, 제 고향이 금강산 자락의 온정리라는 마을인데, 물 좋고 공기 좋은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다음에 통일이 되면 꼭 우리 다시 만나 소주 한잔합시다.” 그들과 굳게 약속하고 헤어진 지 어느덧 25년이 되어갑니다. 4년 전인가, 국정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탈북해서 들어온 사람인데 자신이 시베리아 벌목공 출신으로 시베리아 지역에서 생활할 때, 신부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저를 지목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름과 인적 사항 등을 전해 들었는데 내가 만난 일행 중 한 사람이 분명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그 형제가 하나원 교육생으로 입소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화천에 있는 하나원을 방문하여 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그 사람이 틀림없었습니다. 반가움과 먹먹함이 한꺼번에 밀려와 한동안 말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함께 했던 일행 중 상당수는 시베리아 지역에서 목숨을 잃었고, 일부는 다른 도시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자신도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험난한 생활을 이어오다 중국과 태국을 거쳐 대한민국 땅에 들어왔노라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 얼굴과 몸에 지난 시간 고난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습니다. 그 형제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긴 세월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괜스레 미안한 마음 가득했습니다. 같은 민족으로 같은 하늘 아래 태어났건만 이토록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현실이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남과 북을 갈라놓은 분단선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 남북 분단이 벌써 한 세기 가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기도하며 분단 극복을 위한 노력을 해왔으나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는 것 같아 힘이 빠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습니다.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나약해 보이는 우리의 기도가, 별것 없이 보이는 우리의 평화를 향한 몸부림이 하느님의 이끄심 속에 결실을 맺을 그날이 분명 올 것입니다. 어두운 터널 속에 희망조차 잃어가는 이때, 서로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며 평화의 힘찬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으면 합니다.

천주교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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