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미 헬레나(주교회의 여성소위원회 총무,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대표, 팍스크리스티코리아 공동대표) 이번 호에서는 『피스빌딩 - 가톨릭 신학, 윤리, 그리고 실천』의 4장인, 노틀담대학 정치학, 평화학 조교수 다니엘 필포트(Daniel Philport)의 글을 소개합니다. 카슈미르와 브룬디에서 신앙에 기반을 둔 화해 활동을 펼친 활동가이기도 한 필포트 교수는 현대 정치학에서 화해의 문제에 초점을 둡니다. 긴 논문이라 일부분만 번역하여 싣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진실과 화해위원회 화해라는 정의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로 알려지게 된 것과 정말 많이 닮아 있다. 이 개념은 1970년대에 뉴질랜드, 호주, 미국, 캐나다에서 형사적 정의를 위한 접근법으로 생겨났다. 미국 가톨릭 주교들은 회복적 정의를 범죄와 처벌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접근법으로 지지했다. 회복적 정의를 정치 질서에 가장 잘 적용한 사람은 1990년대 중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진실과 화해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성공회 대주교 데스몬드 투투였다. 이 개념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회복적 정의가 의미하는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세 가지 주제는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1) 범죄(정치적 불의)는 범죄자, 피해자, 지역사회에서의 관계의 파탄이다. (2) 범죄에 대한 대응은 범죄에 연루된 사람들의 관계와 가해자가 남긴 여러 상처와 해악을 치유(보수)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3) 그런 치유는 피해자, 범죄자, 그리고 그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적극적인 참여를 동반해야 한다. 고문의 재연, 진실과 화해위원회 청문회 광경 ©George Hallet/ South African History Online 화해가 회복하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현대 정치 공동체에서, 올바른 관계는 정치적 불의, 즉 사람들이 정치 프로그램과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하거나 구축하는 부당한 행위나 구조를 통해 파괴된다. 가해자로는 정부 요원들과 그와 반대되는 세력 구성원 둘 다가 포함된다. 여기서 윤리적 맥락은 체계적인 정치적 불의로, 그것은 대규모로 발생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한 사회의 거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종류의 행위와 법이 불공정할까? 실제 진실 재판소, 특별조사위원회(tribunals), 정화 계획(lustration schemes), 보상 합의안, 그리고 정치적 사과는 마치 신탁에다 하듯이, 수많은 국제 문서에 적용되어 있는 인권과 전쟁 법규를 - 즉 전쟁 범죄, 인류에 대한 범죄, 대량 학살, 고문,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강간과 관련하여 - 규정하는 규범에, 그리고 때로는 경제적 불의뿐만 아니라 그 밖의 정치적 권리와 시민의 권리에 반복적으로 호소해 왔다. 하지만 만일 정치적 불의가 인권이나 전쟁 법규의 침해로 정의된다면, 불의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차원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특별한 질감을 지니고, 형태도 여러 가지일 것이다. 올바른 관계를 파괴하는 적어도 6개의 차원의 상처를 소개한다. 1996년 4월 15일,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 증언을 듣고 있는 투투 주교(가운데)의 모습 ©Philip Littleton / AFP / Getty Images (washingtonpost제공) 1. 첫 번째 차원은 바로 정치적 불의에 대한 정의, 즉 피해자의 기본 인권의 침해에 가깝다. 시민으로서 법에 의해 권리가 보장되고 유지되는 존재라는 사실 자체가 인간 번영의 한 측면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침해는 상처 입은 상태의 한 형태를 구성할 수 있다. 2. 정치적 불의는 단지 피해자가 보장받아야 할 법적 지위의 부정을 수반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보다 직접적이고 눈에 띄게, 피해자 바로 그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이 상처 입은 상태의 두 번째 차원이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 사람의 번영의 가장 기본적인 측면을 축소시키는 일에는 그 개인의 죽음,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고문 또는 폭행으로 인한 영구적인 부상, 슬픔, 굴욕감, 트라우마, 재산이나 생활력의 상실, 한 사람의 인종, 민족, 종교, 국적, 또는 젠더, 성적 침해, 한 개인이 속한 공동체의 정복과 속박, 토지의 침탈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해악들이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이 인간 존엄성을 침해한 행위이다. 3. 상처 입은 상태의 세 번째 차원은 피해자가 자신을 해친 정치적 불의의 근원과 상황을 알지 못하는 상태, 피해 그 자체를 구성하는 무지이다. 무지에 대해 가장 공통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실종자와 사망자의 친척들이다. 이들의 증언은 전 세계의 진실위원회 보고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 아이의 뼈라도 보여줄 수만 있다면... 도대체 그들은 내 아이의 뼈를 어디에 둔 걸까?” 한 실종자의 어머니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 활동가에게 한 질문이다. 4. 이런 해악을 심화시키는 것은 무지나 무관심으로 지역 공동체 구성원들이 피해자의 고통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다. 이것은 상처 입은 상태의 네 번째 죄악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 철학자 앙드레 두 뚜아는 “피해자들에게, 사실 이것이 기본적인 침해를 배가시킨다. 문자 그대로의 위반은 피해자를 찾아오는 실제 아픔과 고통, 트라우마로 구성되어 있다. 정치적 침해는 그런 사실을 (공공연히)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썼다. 가톨릭 관점에서, 그런 인정의 결여는 가난하고 상처 입은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모방한 고통당하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실천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5. 상처 입은 상태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차원은 가해자에 초점을 맞춘다. 다섯 번째 차원은 가해자가 행한 정치적 불의의 지속적인 승리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이런 불의는 물질적, 심리적, 정신적 해악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행위를 특징짓는, 피해자의 존엄성을 무시한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가해자가 아무 도전도 받지 않고 승리를 거두었다는 승리감을 남긴다. 그 자체가 피해자에게 그리고 공동체의 공유된 가치에 끼치는 해악이며, 침해 그 자체로 분명하게 드러난 존엄성에 대한 폭력을 확대시킨다. 6. 정치적 불의는 피해자에게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발사된 대포처럼, 다시 되돌아가 가해자에게도 상처를 입힐 수 있다. 그런 악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영혼에 종종 심각한 심리적 손상으로 드러나는 상처를 입히는데, 인간의 죄는 그저 ‘부채를 적는 칸(liabilities column)’에 표시 하나를 남기는 일에 그치지 않고, 죄인의 삶에 정말로 실질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보는 가톨릭 전통의 내용과 깊이 공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