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선 벨라뎃따(평화사도 1기 & 동화작가, 평화운동가) 미얀마 사태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는다. 어쩜 이리도 80년 광주와 닮았는지.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역사는 보란 듯이 되풀이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이 나중 일의 스승이 될 수 있다-사마천 1차 세계 대전과 2차 대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그리고 걸프전. 아르메니아 대학살과 유대인 대학살, 난징대학살과 캄보디아 대학살, 보스니아내전과 르완다 대학살... 우리나라에서도 제주 4.3과 한국전쟁 중 일어났던 민간인 학살 그리고 광주 5.18이외에도 인간에 의한 인간의 학살은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그 잔인함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며칠 전, 여러 명이서 ‘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이라는 영화를 봤다. 나 혼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너무 끔찍해 차마 볼 수 없었던 장면이 많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현 미얀마사태와 80년 광주가 떠올랐다. 영화 ‘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 포스터 당시 인도네시아의 정권을 잡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수하르토의 추종자였던 ‘안와르 콩고’가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영화 제작진들은 1965년 당시 인도네시아 상황을 영화로 만들거라고 제안했고, 안와르 콩고와 그의 친구들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안와르 콩고는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주인공을 연기할 정도로 열성적으로 영화 제작에 참여하였다. 영화의 첫 장면은 안와르 콩고가 사람들을 잡아와 죽인 건물에서 시작되었다. 안와르 콩고는 기존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 좀 더 나은 방식으로 사람을 죽였노라고 직접 재연해 보였다. 그의 활짝 웃는 얼굴은 자랑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영화 내내 안와르 콩고와 당시 동료들(인도네시아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음)은 과거의 학살이 국가를 위한 일이어서 아주 떳떳하다고 밝혔다. 이 영화가 공개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찬사를 보낼 거라고도 확신했다. 영화 막바지에 이르자 안와르 콩고는 자신이 직접 피해자가 되었다. 자신의 목이 졸려 숨 쉬기조차 힘들어 지는 순간, 그 고통의 순간에, 안와르 콩고는 자신이 저지른 참상의 실체를 깨닫는다. 안와르 콩고(Anwar Congo) Ⓒ한국일보 “신에게도 비밀은 있을 거야.” “역사를 다 밝혀야 하나. 밝혀지는 게 좋지 않은 진실도 있어요.” 이렇게 믿었던 안와르 콩고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이다. 그의 양심이 그의 잘못을 일깨웠다. 똥 찾아가세요권오삼 시, 오정택 그림 『똥 찾아가세요』 표지 누가 승강기 안에다 똥을 눴다 똥 덩어리가 내 주먹보다 더 컸다 경비실에 가서 이야기했더니 경비아저씨가 똥을 치웠는지 나중에 보니 똥은 보이지 않고 대신에 승강기 안 게시판에 쪽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 경비실에서 알립니다 - 오늘 어느 분이 승강기 안에다 누렇게 잘 익은 똥 한 덩어리를 빠뜨리고 그냥 내리셨는데 경비실에 잘 보관하고 있으니 주인 되는 분은 꼭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 다음날 궁금해서 물어보니 똥 찾으러 온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자기 똥을 자기 배 속에 잘 간직하고 있다가 버릴 때가 되면 화장실 변기통에 버려야 그게 바른생활 사람이다.(권오삼 동시) “하느님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용서하는가?” “신을 믿지 않아도 자신의 양심을 따르면 신은 자비를 베풀 것이다.” 무신론자의 질문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답변하셨다. 양심(良心)은 좋은 마음이다. 승강기 안에다 누렇게 잘 익은 똥 한 덩어리를 빠뜨리고 그냥 내리는 행위는 결코 좋은 마음(良心)이 아니다. 실수였다면 승강기로 가서 자신의 양심을 데려와야 좋은 마음이다. 그래서 좋은 마음(良心)은 지키기가 쉽지 않다. 순간적으로 놓쳐버린다. 인도네시아의 무고한 시민을 향해 내리쳤던 칼날은 양심에 따른 행동이었고, 광주 시민을 향한 총부리도 양심에 따른 행위였으며, 미얀마 국민에게 쏟아진 총알 역시도 양심에 따른 행동이었다면 도대체 양심이란 뭘까? 작년 한 해, 코로나19로 우리들은 미사를 드릴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드라이브 스루(자동차를 타고 와서)로 영성체를 모시게 되었다. 대다수 신자들은 누가 이런 기특한 생각을 다 했냐며 환호했다. 이 일은 분명 좋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차가 없거나, 운전을 못하는 신자들은 어찌해야 했을까. 그렇다고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해야겠냐고 묻는다면, 차라리 안 하는 편이 좋았다는 게 내 솔직한 마음이다. 시소가 균형을 유지하려면 누군가가 앞쪽에 앉든, 누군가는 반드시 뒤에 앉아야 한다. 하느님 잣대 라면 약자에게로 일방적인 기울어짐이 수평일 듯하다. 좋은 마음(良心)은 이리 세심(細心)해야 한다. 세심하지 않을 때, 학살의 역사는 보란 듯이 되풀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제발 경비실에 보관하고 있는 누렇게 잘 익은 똥을 찾아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