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찬 나보르 신부(파주 참회와 속죄의 성당 부주임) 아직 별이 떠 있는 영하 20도의 새벽, 아파트 앞 광장에 줄을 서서 빵 차를 기다린다. 부드럽고 맛있는 빵이 아니라 딱딱하고 시큼한 맛이 강한 검은 흑빵을 사려고 줄에 선다. 그마저도 수량이 정해져 있기에 줄 끄트머리에 서 있으면 초조해진다. 어느 날 인가는 내 바로 앞에서 빵이 떨어져 허탕 치고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물론 시내에 가면 비싸지만 좋은 빵을 살 수는 있었다. 러시아 흑빵 당시 러시아라고 하지만 지방 도시들의 분위기는 아직도 소련, 소비에트 연방(СССР)의 모습이 짙었다. 유럽 근방의 대도시는 다르겠지만, 그 반대 동쪽 멀리 있는 지방의 사람들은 오히려 사회주의 체제를 그리워했다. 그래도 사회주의 시절에는 국영 농장의 일거리와 여유롭지는 않지만, 노후를 보장해 주었던 연금이 나오기에 풍족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굶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소련의 해체와 러시아의 개혁 개방은 미처 자유 경제체제를 준비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을 경제적 빈곤으로 내몰았고 불만을 품게 만들었다. 또 한참 후에 알았지만, 당시 1996년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기가 한창 일 때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외화벌이를 위해 북에서 송출되어 온 벌목공들을 심심치 않게 보았다. 기억나는 그들의 모습은 무표정하거나 주위를 경계하는 듯한 인상이다. 1994년 시베리아, 북에서 온 벌목공들의 모습 Ⓒ 강재훈 사진부 기자/한겨례 제공 어느 날인가, 빵을 사러 시내 백화점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북한 벌목공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인형 매장 앞에서 당황해하고 있었다. 매장에 있는 무섭게 생긴 여직원은 팔짱을 끼고 언성을 높이면서 두 사람을 향해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 할 수 있으면 도움을 주려고 그분들에게 다가가 “도와 드릴까요?”라고 말을 건넸고, 처음에는 역시나 경계의 눈초리를 보였지만 빵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을 보더니 이내 긴장을 풀고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러시아에서 2년간의 벌목공 일을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가기 전에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러 왔고, 딸에게 줄 선물을 사려고 인형 매장에 와서 마음에 드는 인형을 골랐는데 매장 직원이 돈을 줘도 안 받고 알아듣지 못할 말만 반복하면서 나중에는 화까지 내더라는 이야기였다. 나도 겪어본 일이기에 어떤 상황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먼저 백화점이나 큰 상점에서 물건을 사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지금이야 돈을 내고 필요한 물건을 바로 살 수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언어가 안 되거나 결재 시스템을 모르는 외국인이라면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사지 못하는 황당한 일을 겪는 것이 다반사였다. 먼저 상점이나 백화점에 들어가서 진열된 물건을 바로 살 수는 없다. 우선 진열대에서 사고자 하는 물품을 확인하고 그 물품의 물품명과 금액을 기억하고 이동하여 철창으로 둘러싸인 ‘까사’(касса)라고 하는 계산대에서 직원에게 물품명과 수량, 금액을 말하고 돈을 내면 물품명과 금액이 적힌 영수증을 인쇄해준다. 그 영수증을 다시 물품대에 있는 직원에게 보여주면 영수증을 확인하고 물품을 내어주는 방식이다. 이렇다 보니 처음으로 백화점에 와본 그 남자가 당황해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인형 구입에 성공한 그는 너무나 고마워하였다. 당신이 떠나올 때는 갓난아이였는데 이제는 걸어 다니고 말도 잘한다는 딸아이가 좋아할 거라며, 무척이나 보고 싶다고 하였다. 그 벌목공은 곧 자신이 떠나온 북으로 돌아간다. 그곳의 사정은 무척이나 어렵다. 그 시기 극한의 굶주림을 이겨 낼 수 없어 탈출을 선택한 이들도 많은 곳이다. 그런데도 그 벌목공은 기쁜 마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희망인 아내와 어린 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숙소에서 북한 벌목공들의 모습 ‘희망이란 것은 세상이 아무리 어둡더라도그들만의 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