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화해하기, 평화에 관해 스스로 공부하기제3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바오로 6세 교황 (1969. 11. 14. 발표) 성인 품에 오르신 바오로 6세 교황(오른쪽)과 로메로 주교(왼쪽) 저는 평화가 참된 삶이며, 인간 세계의 이상적 골격이라고 단언합니다. 저는 평화가 실제로는 최종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평화가 움직임 없는 고요함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평화가 “질서의 고요함”이라는 유명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만일 여기서 우리가 질서를 추상적 관념으로만 생각했다면, 만일 우리가 인간의 질서를 하나의 상태라기보다 하나의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평화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이 정의를 오해했을 것입니다. 질서는 질서를 옹호하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질서를 창출하고 누리는 사람들의 의식적인 노력과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질서가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 되려면, 질서는 언제나 완성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곧 질서는 끊임없이 존재하고 새로 만들어집니다. 달리 말하면 마치 비행기가 지속적인 추진력이 뒷받침되어야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인간다운 질서도 앞으로 나가는 움직임에 달려 있습니다. 제가 왜 이 말을 하겠습니까? 제 말이 특별히 젊은이들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벗들이여, 우리가 평화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어떤 억압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우리가 지금 도달한 어떤 수준이 아니라, 우리 각자 그리고 누구나 다 언제나 도달하기를 열망하는 더 높은 수준을 가리킵니다. 평화는 우리를 잠재우려 달래는 거짓 철학이 아닙니다. 평화는 행동 철학입니다. 이 철학은 우리 모두가 공동선에 책임을 느끼도록, 우리의 모든 노력이 인류의 참된 대의 곧 평화의 대의에 헌신토록 하는 의무를 부과합니다. 스스로 이런 확신을 분석하기 바라는 사람들은 많은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세계를 지배하는 관념들이 반드시 철저히 변화해야 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 모든 지배적 관념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오류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관념들은 특수하고 제한적 이며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하나의 관념, 보편적 사랑이라는 관념, 곧 평화라는 관념만이 근본적으로 선하고 참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관념이 매우 단순하면서 동시에 매우 어렵다는 것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관념은 그 자체로 매우 단순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랑을 위하여, 평화를 위하여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관념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떻게 사랑을 보편 원리인 존엄으로 고양시킬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사랑이 동시대인의 마음에 자리잡을 수 있겠습니까? 투쟁, 이기심과 증오에 깊이 빠져 있는 현대인에게 말입니다. 누가 자신의 마음에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인류를 향한 사랑이 있다고 말입니까? 여전히 존재하게 될 인류, 내일의 인류, 진보의 시대를 살 인류를 향한 사랑, 강제로 그리고 이기적이며 착취하는 사리사욕으로가 아니라 형제적으로 사랑하는 화합으로 일치하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는 진정한 인류를 향한 사랑을 말입니까? 평화라는 위대한 관념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오늘 당장 새로운 이념적 교육, 평화를 향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우리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먼저 평화를 알고, 인식하고, 의지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평화를 표현해야 하고, 이 평화를 인류의 혁신된 도덕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이 평화를 인류의 철학, 인류의 사회학, 인류의 정치학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저의 형제 주교 여러분, 이 미래지향적 시각의 위대함을 실현해봅시다. 그리고 첫 번째 계획, 곧 평화에 관해 스스로 학습하는 계획을 용감하게 수행해봅시다. 우리는 이 계획이 갖는 역설적인 겉모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계획은 실재의 밖에서, 철학이나 사회학이나 역사의 모든 직관적인 실재 밖에서 확실히 증명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겉으로 보면 싸움이 법칙입니다. 싸움이 성공시키는 힘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싸움이 정의입니다. 이 냉혹한 법칙은 인간 진보의 어느 단계에서나 늘 다시 고개를 듭니다. 오늘날 세계 대전이라는 끔찍한 경험을 하고도, 우리 위에 맴도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싸움입니다. 폭력조차 그 추종자들과 아첨꾼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혁명이 정의를 암시하는 온갖 것에, 진보라는 온갖 새로움에 명성, 위엄과 신망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혁명은 불가피합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힘만이 인간의 운명을 위한 길을 깨끗이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저의 형제 주교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숙고하고 해결해야 할 큰 어려움입니다. 이 투쟁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 투쟁이 정의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 투쟁이 고상한 마음의 영웅적 의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 저는 이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 투쟁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투쟁이 인류가 지닌 욕구를 밝게 비춰주는 관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세계가 모든 이를 위한 참된 정의에 이르는 길을 걷기 위해서는, 문명이 투쟁 관념, 폭력 관념, 억압 관념과는 다른 관념에서 영감을 이끌어올 때라는 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평화가 비겁함, 무기력한 마음의 나약함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틀림없이 점진적으로, 그리고 가능하다면 당장, 무자비한 무력을 도덕적 힘으로 대체합니다. 평화는 틀림없이 치명적이고 너무나 빈번하게도, 그릇된 효력, 곧 무기, 폭력 수단, 물질적이고 경제적 권력의 효력을 이성과 대화와 도덕적 위대함으로 대체합니다. 평화는 인간입니다. 그 인간은 동료 인간에게 늑대가 되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는 무엇으로도 정복할 수 없는 도덕적 힘을 지닌 사람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도덕적인 힘입니다. - 1969년 11월 14일, 바티칸에서, 바오로 6세 교황 이 글은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에서 2021년 4월 출간된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 실린 ‘제3차 평화의 날’ 담화의 일부를 발췌한 글입니다. 전문은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홈페이지(www.pu2046.kr) 자료실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