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미 헬레나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대표, 팍스크리스티코리아 공동대표) 미국 어번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이자 기독교 문명의 폭력성에 대한 예언적 비평가 월터 윙크(1935–2012)는 ‘구원적 폭력의 신화(myth of redemptive violence)’에 대해 깊이 연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미디어나 문화 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구원적 폭력’의 역동성은 혼란을 상징하는 악당의 폭력에 맞서 영웅적인 주인공이 악당을 제압하여 약자를 구하고, 혼란 위에 질서를 되찾는다는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월터 교수는 이런 신화가 역사 안에 줄곧 존재해 왔고, 지금도 어느 사회에서나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신화는 혼돈스러운 상황을 극복한다고 여겨지는 ‘정당화된 폭력’을 통해 만들어지고 강력하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예수와 비폭력 저항 – 제3의 길(Jesus and Nonviolence: A Third Way)』(김준우 번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03) 월터 교수는 신약성경에 대해서도 창의적인 주석과 문명 비판을 보여주는데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Engaging the Powers)』 (한성수 번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에 그 내용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고, 그 축약본이 『예수와 비폭력 저항 – 제3의 길(Jesus and Nonviolence: A Third Way)』 (김준우 번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03)이다. 핵무기 같은 가공할 무기와 군사력이 세계평화를 보장해 준다고 믿는 패권적 세계질서 시대에, 월터 윙크의 담론은 비폭력 평화주의를 강조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깊이 성찰하도록 돕는다. 폭력에 대한 가장 주된 대응으로는 ‘도망치기(flight)’와 ‘맞서 싸우기(fight back)’를 드는데, 월터 윙크는 비폭력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도망치기’도 ‘맞서 싸우기’도 아닌 제3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비폭력 저항을 가장 잘 드러낸 성경 구절은 마태오 복음서에 나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1)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2)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3)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마태 5, 38-41) “악인(폭력)에게 맞서지 마라”는 가르침을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위 성경 구절에서 3가지 사례를 드셨는데, 이 사례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월터 윙크는 『예수와 비폭력 저항 – 제3의 길』에서 위 구절의 해석에 2장 전체를 할애한다. 이 글에서는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는 구절에 대한 월터 교수의 해석을 그대로 옮겨, 폭력에 맞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창의적이고 혁명적인 제3의 대응 방법인지 배워본다. 왜 오른쪽인가?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의 오른쪽 뺨을 치는가? … 오른손으로 상대의 오른쪽 뺨을 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른손 손등으로 치는 방법이다. 즉 그 의도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욕을 주기 위함이며, 그 ‘꼬락서니’를 제대로 알게 하기 위함이다. 당시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같은 신분의 사람을 손등으로 치지는 않았기 때문에, 만일 그랬다면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만 했다. 그러나 하급자들을 손등으로 칠 경우에는 벌금이 없었다.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하급자들을 훈계하는 통상적인 방법이었다. 주인은 종들을, 남편은 아내를, 부모는 자녀를, 남자는 여자를, 로마인은 유대인들을 손등으로 때렸다. 이것은 불평등한 관계들로서, 각각의 경우 보복을 한다는 것은 자살과 다를 바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굴복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청중들이 누구였는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경우에서 예수님의 청중들은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고소하거나 강제노동을 부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피해자들이었다. 신분, 종족, 성별, 나이, 지위 등의 위계적 질서와 로마제국의 점령으로 인해, 그들이 당하는 치욕을 견딜 수밖에 없으며, 비인간적 대우에 대한 분노를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이미 치욕을 당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왜 왼뺨을 돌려대라고 가르치시는가? 왜냐하면 왼뺨을 돌려대는 행동은 압제자에게서 모욕할 수 있는 힘을 빼앗아 버리기 때문이다. 왼뺨을 돌려대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좋다. 다시 때려 봐라. 네가 처음 때린 것은 네가 의도했던 효과를 얻지 못했다. 나는 네가 모욕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나는 너와 똑같은 인간이다. 너의 지위가 높다고 해서 이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너는 나의 품위를 떨어뜨릴 수 없다.” 이제 때린 사람은 몹시 난처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손등으로 칠 수가 없다. 이미 아무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왼손으로 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일 그가 (오른손) 주먹으로 친다면 그는 스스로 상대방을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손등으로 치는 것의 요점은 신분계급 제도를 강화시키고 불평등을 제도화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왼뺨을 돌려댄 사람을) 매질하도록 명령한다 해도, 그의 주장은 이제 취소할 수 없게 되었다. 즉 그 억압자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이 하급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강자는 약자를 비인간화할 수 있는 힘을 빼앗긴 것이다. 이런 대응 방법은 수동성과 비겁함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에게 도전하는 행동이다. (『예수와 비폭력 저항 – 제3의 길』, 32-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