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빈 멜라니아(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연구원, 샬롬회 회원) 영화 ‘가족의 나라’(2013) 포스터 재일조선인의 삶에 관한 작품은 상당히 많고, 한국에 소개되어 크게 사랑을 받은 영화나 연극도 제법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입니다. 양영희 감독은 제주도에서 건너와 오사카에 자리를 잡은 부모님 아래 자란 재일동포 2세입니다. 그의 작품은 재일조선인으로 자라며 겪어야 했던 혼란과 고통, 복잡한 마음을 진솔하게 담아냅니다. 양영희 감독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사카 지역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핵심간부였습니다. 재일동포 북송이 한참이었던 1970년 아버지는 북송선에 아들 셋을 태워 보냈고, 일본을 떠날 때 고작 스무살 안팎이었던 세 아들은 다시는 북에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누구보다 열렬한 ‘김일성주의자’였던 아버지는 아들들의 북송이 옳은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들이 전하는 북한의 상황은 ‘지상낙원’이라던 말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먹고 입을 것이 없다는 아들들에게 그곳 사람들의 삶이 그렇다면 참아보라고 말했던 어머니는 북의 현실을 알게 된 후로는 30년째 온갖 생필품을 장만해 바리바리 큰 짐을 꾸려 북으로 보냅니다. “오직 엄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면서요. 영화 ‘가족의 나라’ 스틸컷 부모님과 함께 홀로 일본에 남은 외동딸, 양영희는 아버지의 신념을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며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 성장합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나중에는 한국 국적을 취득한 양영희에게 북은 이해할 수 없는 나라이지만, 여전히 오빠들과 조카들이 사는 나라이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념이 깃든 나라입니다. 딸 역시 조국의 자랑스러운 일꾼이 되길 원하며, 일본인이나 미국인이 아닌 남자와 결혼하기를 바라고, 유학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해도 국적을 바꾸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아버지와 양영희 감독은 오랜 시간 불화를 겪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항상 강하고 단단하게 보였던 아버지도 점점 늙어가고, 몸과 마음도 약해집니다. 그리고 이제는 딸에게 “너는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라”라고 말하며, 한국으로 국적을 바꿀 것을 허락합니다. 약해진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마음은 복잡하지만, 비로소 아버지와 딸은 마음을 열고 대화를 시작합니다. 영화감독이 된 양영희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와 나눈 대화를 담아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을 제작합니다. 카메라를 손에 든 딸은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들 셋을 다 북으로 보냈던 것, 이제는 후회해요?” 조총련의 걸출한 간부인 아버지의 밑에서 자랐지만, 도저히 몸과 마음으로 온전히 북을 나의 나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양영희 감독의 개인사는 이후 발표한 다큐멘터리 <굿바이 평양>, 극영화 <가족의 나라>에도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영화 <가족의 나라>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합니다. 양영희 감독이 투영된 캐릭터 리애가 자신을 감시하는 양 동지에게 “당신도, 당신의 나라도 싫다.”고 말하자 그는 “그 나라에서 네 오빠도, 나도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양영희 감독에게 북은 어디까지나 가족의 나라였지만, 가족들의 나라였기에 북을 바라보는 그의 심경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화 ‘가족의 나라’ 스틸컷 양영희 감독이 그의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전하는 현실과 메시지는 단순하거나 선명하지 않습니다. ‘재일조선인’이라는 그의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일본과 한국, 북한 사이 복잡한 정세와 양영희 감독이 속한 다양한 세계가 충돌하는 모습을 영화에 담아냅니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무엇보다 가족의 이야기이기에, 그 안에 담긴 이야기도 이념이나 현실을 뛰어넘는 화해와 휴머니즘의 이야기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연극, 책을 통해 재일조선인의 현실을 엿보다 실제로 일본을 오가며 재일조선인 3세, 4세들과 교류하게 되며 양영희 감독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몇 번 꺼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응은 제 기대와는 달리 복잡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제 예상과는 달리 “누구인가?”라고 되려 물어오고, 또 누군가는 “그 사람은 온전히 우리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조금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오기도 했습니다. 한 가족 안에서도 아버지는 ‘김일성주의자’이고, 아들은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북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북의 사람이며, 딸은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이내 한국 국적을 취득했던 양영희 감독의 가족처럼 재일조선인 사회 안에서도 북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복잡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음을 느꼈습니다. 한 공동체 안에서도 누구는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국적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는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일본 국적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북을 바라보는 시선도 다양해서 누군가는 여전히 열렬한 조총련의 간부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북한과 민족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이지 사상이나 이념을 따르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긋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북을 향한 직접적이고 솔직한 감정을 말하는 것에서는 조심스러워했고, 또 많은 재일조선인이 실제로 북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처음 재일조선인과 만나고, 함께 일하면서는 이들의 생각과 태도를 규정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이해라는 착각으로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저에게는 그들의 생각을 알아내거나 설명할 권리도 자격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국에 살아가는 우리가 모두 다르듯, 재일조선인 역시 조선학교를 구심점으로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루고 살아가지만, 그 안에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은 서로 다르고, 마음은 더욱 복잡합니다. 영화 ‘가족의 나라’ 스틸컷 서로 너무 다른 세계와 생각 속에 살았던 양영희 감독과 그의 아버지의 늦은 화해가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박평식 영화평론가의 한줄평을 빌리자면 ‘이념이라는 녹슨 대못이 가슴에서 빠지는’ 순간을 포착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양영희 감독에게 북이 ‘가족의 나라’였듯이, 많은 재일조선인에게도 북은 온전히 사랑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가족의 나라입니다. 완벽해서, 온전해서, 사랑받을 만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해도 외면할 수 없는 가족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문득 우리에게도 역시 북은 ‘가족의 나라’가 아니었던가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