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원한다며, 정의를 위해 일하십시오제5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바오로 6세 교황 (1971. 12. 8. 발표) 우리는 평화에 관해 거듭 성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화에 관한 가장 고상한 관념을, 이 세계에서 핵심적이며 근본적인 인류의 선이라는 관념, 곧 문명과 진보와 질서와 형제애라는 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화라는 관념이 인간사에서 여전히 지배적이고, 언제나 꼭 지배적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평화라는 관념이 그 반대 관념이나 행위들로 부정되는 때라면 어느 때나, 그리고 부정되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그 평화라는 관념이 무엇보다 더 절박한 것이 된다고 믿습니다. 평화라는 관념은 하나의 필수 관념, 당위적 관념, 분발케 하는 관념입니다. 평화 관념은 인간의 열망, 노력과 희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평화의 본성은 어떤 목적이 지닌 본성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평화는 개별적이거나 집단적이거나 우리 활동의 기초, 목표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평화에 관해 정확한 관념을 갖는 것이, 그리고 매우 자주 평화를 둘러싸고 정확한 관념을 가짐으로써 평화를 어렵게 만들고 왜곡하는 거짓 관념들을 평화 관념에서 벗겨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젊은이들에게 먼저 말합니다. 평화는 정체된 삶이 아닙니다. 평화는 삶에서 평화의 완성과 죽음을 동시에 발견합니다. 그러나 삶은 운동, 성장, 일, 노력, 성취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이 평화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시간 안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 나갈 때 평화는 그의 최고선과 일치하고, 이 최고선은 절대 전부 얻을 수 없겠지만 언제나 새롭게 끊임없이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평화는 가장 능동적인 열의에 추진력을 불어넣는 중심 관념입니다. 우리가 모두 억누를 수 없는 이 외침을 확신하고 있는데, 평화를 위해 정의라는 토대를 쌓아야지, 무엇 때문에 다른 토대를 쌓으려 시간을 허비합니까? 최근 주교 시노드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민족 공동체들 안에서 뿐 아니라, 국제 수준에서도 더 큰 정의를 구축하는 과업이 여전히 남아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가장 적극적으로 보장해야 하는 인간 정신의 권리인 종교적 권리를 자유롭고 일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주민들이 있는데 이것을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어느 권위, 이념, 역사적 혹은 시민적 관심사가 정당한 인간적 표현으로 드러나는 그 종교적 정서를 억압하고 질식시킬 수 있는 권리를 오만하게 주장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미신적이고 광신적이며 무질서한 표현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으뜸 정의를 짓밟음으로써 스스로 강제할 권리를 주장하는 그런 평화에 우리가 어떤 이름을 붙여주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정의의 다른 명백한 형태들이 손상되거나 짓밟힌 곳이 있다면, 그 형태들이 민족적이건 사회적이건 문화적이건 경제적이건 그 같은 폭압적 과정의 결과로 나타난 평화를 참된 평화라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안정된 평화라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안정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정의롭고 인간적인 평화라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나라나 다 그것이 경제적이건 정치적이건 그 어떤 지배하려는 의도나 계산된 지배의 목표로부터 자유로운 협력의 틀 안에서, 고 유하게 발전하는 것을 촉진할 수 있게 할 의무를 갖는데 이 의무도 정의의 핵심 요소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지극히 심각하고 복잡합니다. 문제를 악화시키거나, 실제 수준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 자리에서 말하고 있는 저의 권한 밖입니다. 그러나 평화를 기념하자는 이 초대가 정의를 실천하자는 초대로 울려 퍼지는 것은 바로 이 자리에서입니다. “정의는 평화를 가져올 것”(이사 32,17 참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더 예리하고 역동적인 정식, “당신이 평화를 원한다면, 정의를 위해 일하십시오.”를 반복합니다. 이 초대는 정의를 실천할 때, 정의에 대해 정의(定意)를 내릴 때, 그리고 나서 무엇보다 먼저 정의를 발동시킬 때 일어날 수 있는 난관들을 간과하지 않는 그런 초대입니다. 왜냐하면, 이 초대는 언제나 상당한 정도의 위신과 사리사욕을 희생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평화의 길에 양보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위대함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사람의 권리들, 참된 것이건 그렇다고 추정되는 것이건 이 권리들을 위해 싸우기 위해서라도, 이 권리들을 반대자들에게 강제하기 위해서라도 영혼의 위대함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아마도 정의와 평화의 길에 양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영혼의 위대함이 필요할 것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결합된 이상들이 지닌 힘은 현대인 안에 그 이상을 작동시킬 도덕적 에너지를 낳았습니다. 우리는 그 이상들이 점진적으로 승리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정의와 평화가 일치된 이상들이 지닌 힘을 신뢰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현대인이 자신의 힘으로 평화의 길을 이해한다는 것을 어느 때보다 더 확신합니다. 현대인의 이 이해는 그를 정의의 촉진자가 될 수 있게 만드는데 충분하고, 이 정의는 평화의 길을 열어주고 인민에게 과감하고 예언적인 희망을 지니고 그 평화의 길을 걷게 할 것이라 우리는 어느 때보다 더 확신합니다. 이 글은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에서 2021년 4월 출간된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 실린‘제5차 평화의 날’ 담화의 일부를 발췌한 글입니다. 전문은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홈페이지(www.pu2046.kr) 자료실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