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석(베드로) 신부 | 민족화해위원장 전쟁 중 폐허가 된 덕원 수도원 성당(사진=평화방송.신문 제공)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은 1945년 해방 당시 독일인과 한국인 수도자 1백여 명이 생활했던 곳입니다. 분원의 형태로 함경도 전역에 본당, 수녀원, 교육기관 등을 가지고 있었으며, 덕원 수도원 자체만으로도 440헥타르의 대토지를 소유했다고 전해집니다. 수도원 안에는 신학교, 인쇄소, 양조장, 정미소, 농장 등이 있었는데, 1946년 3월 토지개혁으로 토지 대부분을 몰수당한 이후에도 수도원은 북한 정권으로부터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948년 12월 수도원 경리 책임자 신부가 포도주 불법 제조 및 탈세 혐의로 체포되고, 1949년 4월에는 인쇄소 책임자 수사가 불온 문서 인쇄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이어졌습니다. 공산주의 세력에게 베네딕도회와 같은 조직력을 가진 천주교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혁명에 가장 큰 장애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한편, 북한지역에서 이루어진 급진적인 토지개혁은 천주교회에 매우 심각한 도전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19세기 말부터 한국 천주교회는 ‘교민주의’ 선교정책을 활용했는데, 이는 소작지를 운영해서 경비를 충당하는 한편 토지 임대를 통해 교인들을 유지, 확대하는 선교정책이었습니다. 1886년 한불수교가 이루어지고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자, 가톨릭교회는 효율적인 선교와 교회의 운영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서 토지를 활용했습니다. 물론 교회 역시 신자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작농 농민의 열망이나, 사회 정의를 향한 시대적인 요구를 무시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토지개혁의 단행은 교회의 수입이 급감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 정의를 위해서 어느 정도 개혁이 이루어져야 했던 상황에서 급격한 토지개혁이 천주교가 반공주의에 앞장섰던 이유가 됐다는 해석입니다. 최근에 이루어진 구술사 작업에서 덕원 신학교 출신인 윤공희 대주교님은 토지개혁에 수도회의 ‘다른 반응’도 언급하셨는데, 당신이 기억하는 당시 신학교 학장 신부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십니다.“교회 역사를 보면 수도원은 언제나 부자가 되기 마련이에요. 노동력 좋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수도원은 부유해집니다. 역사 안에서 볼 때 수도원 스스로가 재산을 포기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이렇게 ‘혁명’과 같은 일이 벌어지면 재산이 없어집니다. 하느님의 안배로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예수성심성월을 지내는 교회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도 더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재산의 몰수로 굶주림을 겪어야 했지만, 폭력의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안배를 믿었던 신앙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따르는 6월이었으면 좋겠습니다.